우리마을 이야기(17) 진안읍 오천리(2) … 외오천(바깥머우내, 원촌)

▲ 봉우재에서 바라본 오천리 바깥머우내 전경
매콤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장마가 걷힌 요즘 농촌에서는 빨갛게 익은 고추를 널어놓고 말리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풍겨오는 매운 향기가 전혀 싫지 않다.

이번에는 지난주 찾았던 평촌마을 뒤 봉우재 길에 있는 바깥머우내(외오천)와 이곳에서 한참 밑에 떨어져 있는 원촌(원터)를 찾았다. 두 자연마을은 외오천(外梧川)이라는 행정리로 묶였는데, 이 가운데 바깥머우내는 집이 50∼60호가 있는 오천리에서도 규모가 큰 마을이다. 그리고 원촌은 식당과 함께 4집 정도만 살고 있는데, 점심시간을 전후해서 이 앞을 지나면 맛있는 음식 향기가 솔솔 풍겨와 식욕을 자극한다.

▲ 국도 가에서 바라본 원촌 모습. 이곳에는 식당이 있어 끼니 때마다 맛있는 향기가 풍겨온다.
◆매봉에 안겨 물봉산 바라보는 마을
바깥머우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내에 머우나무(머귀나무)가 많아 ‘머우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이름은 인접한 죽산리 안머우내와 같지만, 주민들의 얘기로는 특별한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지형과 마을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바깥머우내에 들어서면 마을이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봉우재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다.

바깥머우내는 마을 뒤 매봉을 주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물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주에도 소개했지만, 물봉산 중턱은 ‘익산-장수간 고속도로’ 공사로 산허리가 잘려나가 안타까움을 던져준다.
그리고 마을 양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줄기가 이어지는데, 풍수상 청룡과 백호에 해당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다.

▲ 오래된 나무가 불타면서 당산제를 올리는 위치가 바뀌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마을숲이다. 이곳 역시 오래된 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 좋은 경관을 이룬다.
◆당산제 전통 지금도 이어져
본래 바깥머우내에는 수백 년 된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풍수로 따지면 백호 자리다. 마을을 지켜주는 정말 크고 듬직한 나무였는데, 안타깝게도 불에 얽힌 사건으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나무에 큰 구멍(아마도 밑부분에 동굴처럼 홈이 있었던 모양이다.)이 있었는데, 당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 불이 옮겨 붙어 불이 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고 나무도 일부만 타서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마을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이 나무 근처에서 절대로 불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단다.

그런데 또 한 번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졌다. 그 구멍에 커다란 말벌 집이 있었는데, 당시 한 젊은이가 그것을 없애려고 불을 놓은 것이다. 이 불은 결국 나무 전체로 옮겨 붙었고, 모두 타버려 결국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죽은 당산나무를 대신해 심은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그 아래 그늘이 지는 자리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 구실을 하고 있다.
“당산제는 물론이고 백중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크게 잔치를 열었어요. 얼큰하게 술이 돌고 풍물이 어우러지면서 정말 흥겨웠는데….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 말씀 안 듣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던 이돈태씨로부터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이돈태(67)씨가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얘기해주었다. 이씨는 예전의 흥겨웠던 모습을 떠올리자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당산나무가 죽은 뒤에는 마을 왼쪽에 있는 숲(크고 나이 많은 나무가 여러 그루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숲 위쪽의 평평한 터에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만들어 놓은 ‘청풍정’이라는 정자가 있다.)에서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 왼쪽에 있으니 풍수상 청룡이다.

마을의 남자 원로들이 중심이 돼 이루어지는 여느 당산제와 달리 바깥머우내 당산제는 부녀회가 주축이 돼서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각 집은 금출을 치고 소금을 뿌려 잡귀를 막는다. 그리고 남자들은 풍물을 치면서 각 집을 돌며 당산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걷는다. 이렇게 마련된 돈은 돼지머리, 밥, 떡, 팥죽, 과일 등을 사는데 사용한다. 그렇게 주민들은 제를 올리고 소원을 담은 소지를 올린다.

▲ 한때 마을에서 제를 올리던 수백년 된 나무가 있었던 곳에 새 나무 두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 오래된 나무는 사람들의 부주위로 불에 탔다고 한다.
◆기우제 지내던 매봉 날망
바깥머우내에서는 마을 주산인 매봉에서 기우제도 지냈다. 기록에는 1940년대까지 지냈다고 한다. 기우제는 날망에 있는 큰 소나무 두 그루에서 지냈는데,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돼지를 잡고 피를 뿌렸다. 동네 처녀들은 챙이를 둘러쓰고 올라갔는데, 이때 비가 오는 것처럼 물을 뿌렸다. 그러면 어김없이 비를 맞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이 벌어졌던 시기에 큰 나무 하나가 불에 타 쓰러졌다. 산에 불이 났는데, 전쟁 중이어서 불을 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불은 두 나무 가운데 하나에 붙었고, 이 나무는 ‘대포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 밖에도 기록에는 ‘방아훔치기’라는 전통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청년들이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다른 마을에서 방아를 훔쳐와 마을 앞에 세우는 것이었다.

▲ 바깥머우내 마을회관. 혹시나 하고 찾아갔지만, 농번기여서 주민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인물이 많이 나는 마을
좋은 풍수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마을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꽤 나왔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의 대법원 판사도 있었다고 주민들은 얘기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멀지 않은 과거에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서 성공한 자손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 주민은 “젊은 사람들은 직장 때문에 떠나고, 성공한 사람도 도시로 나가고, 결국엔 농사짓는 토박이들만 마을에 남는 것 아니겠느냐?”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진 숲거리
바깥머우내에서 조금 내려오면 왼쪽으로 ‘숲거리’라는 곳이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관리하던 나무가 많이 있어 숲을 이뤘는데, 1970년대 숲이 사라져 지금은 이름만 남았다. 그래도 숲거리 주변을 살펴보면 보기 좋은 소나무가 멋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바깥머우내에 있는 구멍가게. 노인 한 명이 가게를 보고 있는데, 이날은 진안읍에 일이 있어 나가야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선술집 즐비했던 원촌
지금 국도 27호선이 난 길은 옛날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평촌에도 주막이 즐비했다는 주민들의 설명이 있었는데, 그 위 원촌 역시 그랬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식당과 함께 네 집이 있는데, 옛날에도 밥과 술, 숙박할 수 있었던 주막이 즐비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촌에 들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장사꾼이었다. 우리 고장은 물론 장수와 임실, 무주, 멀리는 경상도까지 오가는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촌은 허기를 채우고 피곤한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이었다.

▲ 외오천에서 진안읍 가막리로 넘어가는 봉우재 모습. 경사가 비교적 급해 곳곳에 과속방지턱을 만들어 놓았다. 비교적 교통량도 많은 편이었다.
◆수레 다니던 마을길
원촌에서 바깥머우내를 거쳐 가덕리로 넘어가는 길은 예전에 수레가 간신히 다니던 좁은 마을 길이었다. 그러다 도로가 닦이고 가덕리와 이어지면서 지금은 시내버스가 다닌다. 지금은 승용차와 농사용 화물차 통행도 잦은 편이다.
이 길은 봉우재에서 바깥머우내까지 경사가 심하다. 그래서 교통사고 위험이 커보였다.
다행히 도로 중간마다 과속방지턱을 만들어 놨는데, 턱이 높지 않아 도로에 익숙한 운전자들은 속도를 많이 줄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 이 도로를 지나던 운전자들의 요구로 턱을 낮췄다고 하는데, 그 어떤 이유보다 주민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취한 조치였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 마을 폐창고에 붙어 있는 향약의 네 가지 규율. 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농사일 바쁜 주민들
바깥머우내 위쪽을 돌아보다 황내하(68), 윤장순(60)씨 부부와 윤씨의 어머니 장경례(80)씨를 만났다. 황내하씨 부부는 고추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았던 옥수수를 수확하고, 옥수수 대를 뽑아 경운기에 싣고 있었다.
“소를 여섯 마리 키우는데 소먹이로 쓰려고요.”

마을을 찾았을 때 주민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대부분 고추 수확을 위해 밭에 나가 있는 상태였다. 장맛비가 걷혔으니 농민들의 바쁜 삶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다.

“교통사고로 몸이 안 좋아서 움직이기 불편해요. 쉬어야 하는데, 이렇게 할 일이 눈에 보이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윤장순씨가 조금씩 발을 내딛으며 남편이 모는 경운기 뒤를 따랐다. 많은 일을 할 수 없어도 조금이나마 남편을 돕기 위해서다. 일손이 부족하니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하는 농촌의 단면적인 모습이었다.
      

 

 

▲ 황내하, 윤장순씨 부부와 윤씨의 어머니 장경례씨가 황소에게 먹일 옥수수대를 경운기에 싣고 있다. 윤장손씨는 교통사고 때문에 움직이는 게 불편하다.
▲ 마을 약도
▲ 고추 수확철이어서 마을 곳곳에서는 고추를 말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덕에 마을 안에서는 매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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