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양동성씨
양 동 성씨
마령면 계서리 계남(溪南)마을 출신
일도종합건설주식회사 전무
일도바이오테크주식회사 전무
재경 마령면향우회 총무역임
재경 마령면향우회 감사

서글픔으로 다가와서/한 줄기 그리움으로 남아/차마 못 잊을 추억 하나/추억이 그 토록 아름다운 건/다시는 만날 수 없음/다시 되 풀이 될 수 없음/그래서 추억은 아름다움입니다./ 사색을 가져다주는 계절의 모퉁이/이따금 스치는 가느다란 바람결에/갓 설레는 열일곱 소녀가 옷을 벗듯이/노란 은행잎이 부끄러이/살포시 살포시 파란하늘 배경삼아 재주를 부립니다./……가을이 다가와서/구슬픈 소리를 들려주면/아리게 살아나는 그리움으로/ 멀리로 멀리로 하늘을 보면/곱게 수 놓였던 추억들이 뭉게뭉게/먼 산 너머로/먼 산 너머로/사라져 숨고/저 홀로 비어가는 하늘/혼자만 혼자되어 비어가는 하늘/하늘이 너무 맑아 눈물이 납니다./

최복현시인의 마음의 길동무 중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인생의 추억을 자극하는 이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잊어가던 어느 가을 아리게 다가오는 향수로, 고향집 풍경 앞에 펼쳐진 그 가을을 읽는다. 평생을 자식만 바라보고 송아지 쇠죽솥에 꿈을 담고 고집스럽게 살아오신 늙으신 아버지와 늘 따스한 어머니의 살아 온 삶의 이야기가 새겨있는 그 들녘의 새 쫓는 메아리 같은 이야기에 묻혀간다.

뒷동산으로 이어가는 내동산을 주산으로 삼고, 섬진강 상류가 흐르는 앞 냇가가 남쪽으로 흐르는 양동성씨의 고향 계남마을은 마을 뒤에는 내산사(萊山祠)가 있으며 처음에 스님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신앙골로 불렸다가 섬진강 상류의 큰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하여 계남(溪南)이라 불렸다.

양동성씨는 이 마을에서 아버지 양훈승씨와 어머니 황점순씨의 4남매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5월, 마을 뒷산에 철쭉꽃이 붉게 만발하던 그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난 양동성씨는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농부였던, 그래도 먹고 살기 넉넉한 부농가(富農家)의 외아들(獨子)로 양 부모님의, 그리고 누나들과 주위의 사랑 속에서 마령초등학교와 마령중학교를 거쳐, 전주영생고등학교 그리고 익산 원광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경기여상에서의 10여 년간 국민윤리를 지도하는 교사로서의 그의 인생은 그가 길러 낸 많은 제자들의 걸어가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형성에서 그는 그 보람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그것을 알았다면 시인하고 시정하는 사회의 관행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지도하였음을 덕목으로 삼는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시정하는 용기를 양동선 선생님은 항상 강조하였으며, 자신의 운명이 어떠하였건 자신의 운명의 열쇠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양동성 선생님은 늘 그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몇 년간의 자신의 여정을 양동성씨는 흥했다 망했다 그렇게 표현한다. 그 표현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적절한 철학적 표현인 것을 우리는 깨닫고 필자도 그렇게 동의한다.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크고 작은 역사의 윤리학사(倫理學史)이거나 인생의 윤회생사(輪廻生死)이거나를 막론하고 우리의 곁에 있었음을 우리가 그렇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대일 입시학원에서, 명동의 금성타자학원의, 금성컴퓨터학원에서, 그리고 향토기업의 대미(大尾)를 꿈으로 이어가고 싶어 하는 후배 기업인의 의지를 그가 알고 있어 기쁘게 참여한 현직에서도 양동성씨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여 후배 오너를 어떻게 보필하는 것이 옳은 것 인가를 항상 잊지 않는다.

필자가 만나면서부터 받았던 그 인상대로 가을 남자를 연상했던 양동성씨는 무척이나 낙천적 이였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임을 감추지 않았다. 1976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1남1여를 두고 있는 그의 아내 장정희(군산.54세)씨는 양동성씨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그의 반려자라 하였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그러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그들 내외는 자신들의 좌우명 삼아 그렇게 살아간다.

내외가 함께 천주교에 귀의하여 함께 봉사하며 어려운 이웃도 잊지 않는다. 독거노인을 보면서 부모님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일찍 깨시여 당시로는 조그마한 농촌지도자였지만 면 의회 의원(面議會議員)을 역임하셨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외양간에 외롭게 엎드리어 지그시 눈을 감고 반추(反芻)의 상념(想念) 속에 빠져 있었던 그 송아지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철학 같던 그 음성을 듣는다.

소는 재산과 풍요와 번식과 제물의 주된 의미인 것을 강조하시던 아버지였다.
소는 원시농경의 바탕으로서의 인식과 부유와 번창이라는 재산관념의 아버지였다.
우리의 고향사람 양동성씨.

그가 지금은 모두 떠나 비어 있는 고향을 간다. 그냥 부모를 만나려 가는 길처럼 마음을 열어놓고 고향을 간다.
햇살이 들이치는 마루턱에 앉아 세월을 음미하는 그 아버지의 세월을 들으려고 거기를 간다. 고운 꽃 향이 지고 만, 주름진 그 어머니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 고향을 간다. 지나 온 세월 고생하며 살아오신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를 만나려고 거기에 간다.

무너져 나간 그 담장 밑에 접시꽃은 없어도, 지금 그 길가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는 없어도 야트막한 돌담너머 세월의 시선만 함께 거기 있었다.
(양동성씨 전화번호: 017ㅡ272ㅡ0253)
/서울취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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