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0) 부귀면 궁항리(1) … 성수암

▲ 궁항리 정수암마을 전경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빗줄기가 지루하게 내리던 지난 4일. 제법 기온이 내려가 피부에 찬 기운이 닿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펼쳐진 밭에는 궂은 날씨에도 빨갛게 익은 고추를 수확하는 농민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다 ‘신궁마을’이라고 새겨진 마을 이정표를 만났다. 군 경계까지 길게 늘어선 궁항리의 첫 마을이다.
일단,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목적지인 정수암으로 향했다. 도로의 맨 끝에 있는 마을이다. 정수암까지 가면서 하궁, 중궁, 상궁 등 자연마을 이름이 적힌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리고 도로가 끝나는 곳, 정수암에 도착했다.

◆활 닮은 마을 지세
궁항리(弓項里)는 신촌과 하궁으로 이뤄진 신궁마을과 중궁, 상궁, 정수암 세 자연마을이 묶인 정수궁마을 두 행정리로 구성된 곳이다.
마을 이름에 ‘궁(弓)’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마을은 마을 지세가 활과 닮았다. 중궁에 있는 ‘화시내골(화신내골)’이 화살에 해당한다고 한다.
본래 궁항리는 진안군 내면 지역으로 ‘활목골’, ‘궁항’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정수암까지 병합해 지금의 궁항리가 만들어졌고, 부귀면에 편입됐다.

▲ 정수암이라고 부르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은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뿌연 쌀뜬물이 내를 타고 흘러 멀리 부귀면 소재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사라졌다. 대신 올해 봄부터 새 절이 들어서고 있다. 전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가는 것 같다.
◆절이 돌아온 정수암
정수암(汀水岩)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정수암이란 큰 절이 있었다. 절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부귀면 소재지까지 흘러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나면서 이 절은 불에 타 부서졌다.

하지만, 정수암이란 마을 이름이 절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힘들다는 일부 마을 주민들의 얘기도 있다.
한 주민은 분명 정수암이란 절이 있었다는 곳에 가면 부서진 기와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나이가 많은 마을 어른들이 마을 유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을 유래를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
어찌됐든, 절에 대한 전설과 절터 흔적만 남아있던 마을에 최근 진짜 절을 짓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타지에 있던 승려가 들어와 마을 위쪽에 대웅전을 짓고 있는데, 올해 봄부터 공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예전부터 절이 있었고, 다시 절이 들어서는 것으로 봐서는 불자들이 수행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모양이다.

얼핏 둘러보기에도 정수암은 북쪽으로 운장산이란 주산을 뒤에 두르고, 왼쪽과 오른쪽에 산줄기가 이어진 채 남쪽이 열려 있는 형세다. 또 주변이 산간지역이기 때문에 청정한 자연환경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름만 남은 산과 골짜기
운장산을 비롯한 정수암 주변 산은 궁항리 주민들이 제를 올리던 곳이다.
먼저, 마을을 바라보면서 2시 방향에는 칠성대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음력 칠월 칠석에 산신제를 올리던 곳으로, 돼지머리와 조기 등을 준비해 올라가 제를 올렸다고 한다. 칠성대 일부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오성대라고 부른다.

또 운장산에서는 기우제도 지냈는데, 운장산 날망에서 궁항리 주민 모두가 참여해 지냈다. 기우제를 올릴 때 주민들은 산 돼지를 잡고 피를 뿌렸다고 전해진다.

칠성대와 운장산 사이 골짜기는 점터란 지명으로 불린다. 기록에서는 상궁 근처 중고개와 황금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점골’이란 곳이 있고, 그곳에 점터라고 불리는 그릇을 만들던 터 ‘사기점’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정수암에도 점터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곳곳에 그릇을 만들던 곳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정수암에서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로 느즌목재(만항치), 북쪽 운장산으로 올라가는 된목, 정수암 뒤쪽에 있는 벼락을 맞은 바위 벼락바우, 정수암 동남쪽 골짜기의 붉은바우골, 정수암에서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로 넘어가는 삼바실 고개, 정수암 동북쪽에 서 있는 바위 선바우, 정수암에서 운장산으로 넘어가는 하누재 등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 정수암마을에 새로 들어서고 있는 집. 전주시에 살던 사람이 퇴직 노후생활을 하기 위해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있다. 이 집 말고도 이 마을에는 이주를 희망하는 도시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한다.
◆작은 변화의 바람
“우리 마을이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50가구가 넘었어요.“
집 마당 곶감 건조장에서 아들 시철(김시철, 3)이를 데리고 나와 일을 하던 김춘석(42)씨를 만나 마을에 대한 일반적인 현황을 들었다.

김씨에 따르면 현재 정수암에는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30여년 전만 해도 쉰 가구가 넘었다고 하는데, 모두 고향을 떠나 마을 규모가 많이 줄었다. 또 남아 있는 마을 주민 대부분은 60세가 넘은 노년층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김춘석씨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 됐지만, 정수암은 작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수암에 살고 있는 박지홍(65)씨를 중심으로 깻잎이 새로운 수익작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정수암에서 노후를 보내겠다고 집을 짓고 들어오는 도시 사람들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빠르고 크지는 않지만 분명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계속된 비로 고추 수확량이 많이 줄었다. 물을 먹은 고추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매달린 것도 성한 것이 얼마 없다.
◆무심한 하늘만 바라보며
계속 비가 내리는 궂은 날이 이어지면서 정수암 주민들의 한숨이 커지고 있다. 올해 의욕적으로 심어놓은 고추의 예상 수확량에서 1/3도 건지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비가 오기 전까지 빨갛게 잘 익은 고추는 계속 내린 비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물을 머금은 고추는 곯아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상품성이 있는 고추만 수확하고 있는데, 자재비도 못 건질 판이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올해 작황이 좋다고 해도 사실 지난해만 못한 것 같아요. 게다가 올해는 가격까지 내려가 기껏 골라서 수확해도 본전도 찾기 어렵게 됐어요.”
그 덕에 박지홍씨가 추진하는 깻잎 재배 농가 확대가 더 탄력을 받을 것 같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목으로 이미 검증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높은 수익을 낸다면 떠나는 마을에서 돌아오는 마을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쌓여가고 있다.

 

 

 

 

▲ 새 수익작물로서 깻잎의 가능성을 확인한 박지홍씨가 출하용 상자를 들어보이며 소개하고 있다. 박씨의 깻잎은 '운장산 깻잎'이란 이름으로 부귀농협을 통해 출하하고 있다. 박씨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깻잎 재배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수암에 기분 좋은 깻잎 바람이 일고 있다. 새로운 수익 작목으로 깻잎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올해 깻잎농사를 짓기 시작한 박지홍(65)씨가 연일 괜찮은 수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부귀면 몇몇 농가에서 그 가능성에 하나 둘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어 가능성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오늘 전주 공판장에서 2kg 들이 한 상자에 1만 6천800원을 받았어요. 1등급이었죠. 깻잎이란 게 우리 마을에 참 잘 맞는 작물인 것 같아요. 내년에는 고추농사를 모두 접고 깻잎을 재배할 작정입니다.”
박지홍씨가 깻잎에 주목한 이유는 오랫동안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설비가 적게 드는 것은 물론, 한 번 심어 놓으면 잔병치레도 없어 많은 손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봄에 첫 수확이 시작되고 늦은 가을까지 계속 출하할 수 있어 수익이 꾸준하다.

“금산에서 1년간 깻잎 재배 기술을 배웠어요. 그곳에서 한 달에 800만 원 이상 수익을 내는 깻잎 농가도 접할 수 있었어요. 저는 올해 시험 삼아서 30평(99.174m²)짜리 밭에 깻잎을 심었는데, 한 달에 35만 원 정도의 수익을 계속 내고 있어요.”

박씨는 올해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는 지금 짓고 있는 고추밭까지 모두 깻잎을 심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깻잎 밭이 100평(330.58m²) 정도인데, 아내와 함께 661.16m² 정도를 지으면 월 200만 원 이상의 고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깻잎 하면 금산군 추부면이잖아요. 그런데 이곳이 오랫동안 깻잎을 재배해서 토질이 많이 상했어요. 게다가 지구 온난화 영향 때문에 깻잎 품질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 부귀면 일대는 지대가 높아 선선한데다가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깻잎 재배에 아주 좋아요. 한 1년만 재배 기술을 익히면 바로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고장의 많은 사람이 깨닫고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지홍씨의 깻잎에 대한 열정에 지역농협도 발을 맞추고 있다.
박지홍씨의 깻잎 출하를 돕는 것은 물론, 깻잎재배를 원하는 농가를 박씨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깻잎재배 농가가 늘어나면 별도의 작목반도 구성해 지원할 방침이란다.
박지홍씨가 방에 들어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이날 아침에 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박지홍 님. 깻잎 4상자 16800원. 전주원협.’
새로운 수익원을 찾은 박지홍씨의 눈빛이 빛났다. 단순히 개인의 수익이 늘어났다는 기쁨 이외에도 깻잎이 부귀면 일대 농민들의 효자 작목이 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내년 정수암 골짜기는 구수하고 상쾌한 깻잎 향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 마을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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