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2) 부귀면 궁항리(마지막)-신궁마을(하궁, 신촌)

▲ 하궁마을 모습. 왼쪽으로 궁항교회가 보인다.
부귀면 궁항리 이야기의 마지막은 신궁마을이다. 신궁마을은 하궁과 신촌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두 마을엔 각각 일곱 가구씩 모두 열네 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 역시 윗마을인 정수궁과 마찬가지로 전주시 등 인근 대도시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고 있지만, 아직은 원주민과 어울려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과 전주시와의 근접성 등을 봤을 때 궁항리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역시 새로운 주거지역으로서 발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맞춰 이 마을을 전략적으로 어떻게 가꿔가야 할지 행정기관과 주민들이 머리를 모으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으로 보인다.

◆가장 젊은 나이 ‘70’
지난 호 소개했던 중궁 아랫마을이 하궁이다. 하궁은 마을에 우거진 숲이 있다고 해 ‘덜밑’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궁항교회와 기동 사이에 조그만 숲이 있는데, 이곳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볼 뿐이다.

하궁에는 궁항교회가 있어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곳은 궁항교회가 있는 도로옆 주거지 말고도 중궁방향 기동골과 하천 너머와 황새목골 등 비교적 넓게 주택이 분포돼 있다. 그러나 빈집이 많아 실제 살고 있는 집은 일곱 집에 불과하다. 이 마을은 인구가 적은데다 노인이 대부분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남성은 올해 일흔인 조병호(70)씨이다.

“우리 마을은 한 때 서른 가구 정도가 살았어요. 그런데 한국전쟁 때 궁항리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많이들 피난을 갔고, 그 뒤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어요. 그래서 이렇게 늙은이들만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죠.”

이런 상황은 아랫마을 신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신촌에 살고 있는 신궁마을 이장 이동선씨 역시 올해 일흔이다. 그렇다 보니 마을이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게 조병호씨의 설명이었다.
  

▲ 하궁마을에서 만나 조병호(오른쪽)씨와 박종진씨
◆쥐, 멧돼지, 고라니 “잡아줘요”
“제가 산양삼을 3ha에 재배하고 있는데, 쥐 때문에 남아나질 않아요. 씨나 모를 심어 놓으면 쥐가 땅을 파고 다니면서 먹어치우거든요. 아마 뿌린 대로 수확했으면 모두 부자 됐을 거예요.”
조병호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마을 저편 논밭 쪽에서 총소리와 유사한 굉음이 들렸다. 멧돼지와 고라니를 쫓아내기 위해 설치해놓은 폭음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저것도 잠깐이에요. 처음 설치하고 나서는 효과가 있는 것 같더니, 짐승들도 익숙해졌나 봐요. 소리가 나면 잠깐 도망갔다가 다시 논밭으로 내려와요.”
궁항리 일대 산에는 고라니와 노루 등 산짐승이 많다고 했다. 작물을 가리지 않고 먹고 파헤쳐 놓는데, 1년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일단 산짐승이나 다 잡아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이야기는 조병호씨 말고도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일할 사람 없고 살기 어려운 농촌인데, 산짐승까지 날뛰니 정말 마을에서 살아나간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궁마을에서 하천 건너편에 살고 있는 박민순씨가 배추밭을 소독하고 있다.
◆전쟁 기억 뚜렷이
하궁마을 역시 윗마을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아픔을 안고 있다. 중궁이나 상궁마을보다는 피해가 덜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주민 중에는 당시에 피붙이를 잃은 경우도 있었다.
“밤이었어요. 방에서 자고 있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그런데 자고 있던 제 여동생이 벽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맞아서 목숨을 잃었어요.”

지팡이를 짚은 박종진(82)씨의 이야기였다. 워낙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억은 아랫마을 신촌에 가면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신촌은 한국전쟁 당시 상궁과 중궁에 인민군이 불을 질러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마을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당시의 난리를 피해 피난을 갔었고, 전쟁 후 정부 정책에 따라 신촌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인민군들이 궁항리 입구를 딱 막고 있어서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요. 주민 중에 한 명이 마을 뒷산으로 숨어 들어가 봉암리로 나간 뒤에 면에 알렸다고 했는데, 인민군이 떠날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죠.”

당시에 하궁에서 살았다는 박종섭(75)씨의 설명이었다. 박씨는 당시에 소총을 들고 마을을 방어했는데, 당시 인민군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때 죽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에 인민군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 집 아래에 땅굴을 파고들어가서 숨어있던 사람들이 불에 타면서 무너진 더미에 깔려 많이 타죽었다고 해요.”
이후 인민군은 철수했고, 그제야 경찰과 무장병력이 마을로 들어와 뒷수습을 했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더란다.
  

▲ 박종섭(오른쪽), 서재심씨 부부가 산에서 딴 버섯을 다듬고 있다.
◆인정 많은 마을 사람들
하궁마을을 돌아보다 김우철(36)씨를 만났다. 김씨는 배추밭에 소독약을 치고 있었다.
“아마 마을에서 제가 가장 젊을 거예요. 그래서 마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제가 농사에 바빠 신경을 쓰고 있지 못해 늘 어른들에게 죄송하죠.”

김우철씨는 인삼, 고추, 벼 등 다양하게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답게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아직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궁항리가 사실 농사를 짓기가 쉬운 곳이 아니에요. 논밭에 돌도 많고, 바람이 세서 인삼밭 차광막이 찢어지고 날아가기 일쑤에요. 그래도 속 편하게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농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고향을 지키고 있나 봐요.”

이번엔 궁항교회가 있는 곳에서 다리 건너편 집 몇 채가 있는 곳에 가봤다. 그곳 길 옆에 주민 한 명이 배추에 소독약을 치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소독약을 치고 있어요. 아이고. 올해엔 비 때문에 농사가 말이 아니에요.”
박만순(73)씨였다. 박씨는 낯선 방문자가 반가웠는지 계속 환하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농사를 얘기할 때는 속이 편치 않은지 표정이 조금은 굳어졌다.

“가뜩이나 비 때문에 농사가 시원찮은데, 산짐승까지 산에서 내려와 논밭을 휘저어 놓으니까 정말 건질 게 없어요.”
앞서 얘기한 신촌마을 박종섭씨는 아내 서재심(61)씨와 버섯을 다듬고 있었다.

“참 맛있어요. 쌉쌀한 것이 씹히는 게 고기를 먹는 것 같고, 아주 맛있어요.”
아침에 산에 가서 따왔다는 버섯이 한 포대가 넘었다. 자연산이니 만큼 생긴 게 제각각이다.
“조금 있으면 추석이잖아요. 그래서 아들네들 오면 주려고 땄어요. 이걸 끓여서 쓴맛을 빼고, 이것저것 넣고 볶으면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조금 줄까요?”

서재심씨가 심각하게 얘기했다. 아침나절 고생해서 따온 버섯이었을 텐데, 낯선 방문자에게도 한 웅큼 나눠주겠다고 할 만큼 궁항리 주민들의 인심은 아주 후했다. 물론, 받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씨는 나중에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그때는 요리 한 것을 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박씨 부부의 나이를 보니 연차가 꽤 많았다.

“난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였죠. 동네에서 아기 데려간다고 말이 많았어요. 호호호.”
박종섭씨가 허허하며 웃었다. 당시 박종섭씨는 전쟁이 끝난 뒤 징집돼서 군복무를 하다 스물일곱에 전역해 서재심씨와 결혼했다. 박씨에게는 늦은 결혼이었고, 서씨에게는 이른 결혼이었다.
  

▲ 마을 약도
◆도시 사람들의 유입
궁항리에는 계속 도시 사람들이 들어온다. 많지는 않지만, 한두 집씩 집을 지어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주택과 주민이 모여있는 마을 안쪽에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땅 구입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대부분이 골짜기에 집을 짓고 들어온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도시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여생을 보내려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마을과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아요. 조용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고 싶은 것 같은데, 사실 사람이 산다는 게 서로 어울리고 부딪히며 살아야 재미난 거 아니겠어요.”

현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사람 구경하기도 어렵다 보니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매우 반가워한다. 그들에겐 그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을이 공동체로서 계속 이어지는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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