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3) 동향면 신송리(1) … 고부(고무정, 부곡)

▲ 잘 살았던 옛날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고무정 마을 풍경
동향면 신송리에 있는 각 자연마을은 참 멀리도 떨어져 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엔 높다란 산줄기가 버티고 있고, 산골짜기로 들어간 것 같은데 어느새 마을이 나타난다. 하나의 법정리로 묶여 있지만, 각각의 마을은 전혀 다른 마을처럼 느껴진다. 이번에 찾아간 마을은 신송리에서도 가장 외딴 곳에 해당하는 고부마을이다.

고부(鼓富)란 명칭은 이 마을이 고무정(鼓舞亭 또는 古舞亭)이란 마을과 절골이라고도 불렸던 부곡(富谷)이하나의 행정리로 합해지면서 붙여졌다. 두 마을 모두 장수군과 작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고, 산이 많은 지형이다. 또 매년 농번기마다 물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이 마을은 인근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잘 사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하나 둘 젊은 사람들이 떠난 이 마을엔 이제 몇 안 되는 주민들만 남아 힘겨운 농촌의 현실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살고 있다.

▲ 부곡마을 입구의 돌장승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
고무정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30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유래가 새겨진 마을비석을 보면, 진주 강씨들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큰 마을로 발전했다고 한다.
고무정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 앞길 건너편에 있는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마을 주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선인봉이란 산이 있다. 이곳의 신선들은 현재 고무정 마을의 정자가 있는 곳에 내려와 장구를 치고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을에서 장수면 쪽으로 바라보면 장구의 오목한 부분을 닮았다고 해 ‘장구목’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다. 미루어 짐작하면 지형상으로 선인봉이 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구전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 마을에서는 신선들이 놀던 자리에 정자를 세우면 마을이 태평하다고 해 해방 직후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는 그 뒤 마을에서 주민 쉼터 및 모임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근방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정자에서 쉬곤 한다.

마을에는 또 이런 전설도 전해진다. 마을에서 장수쪽으로 바라보면 옥녀봉이란 산이 있다. 이 산에는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옛날에 옥녀라는 여자가 베틀을 놓고 베를 짰다는 전설이다. 정확한 전설의 내용과 그 상징에 대해 전해지는 기록은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부분이다.
  
◆굉장히 잘 살던 마을
이 마을은 예전에 인근 지역에서 가장 잘 살던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마을에서 만난 강호동(68)씨는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엔 부자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머슴만 다섯 명이 있었어요. 우리 집 말고도 머슴을 부리는 집이 꽤 됐어요.”

강호동씨에 따르면, 마을에 사람이 많이 살았을 때는 서른 가구가 넘었다. 게다가 집을 지을 터가 없어 몇 가구는 행랑채를 얻어 셋방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이젠 젊은 사람이 모두 떠나고 열한 가구만 남았어요. 노인들만 있으니 마을이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죠.”
  

▲ 고무정 마을 공동 우물
◆안타까운 정자나무의 죽음
이 마을 뒷산에는 마을의 역사보다 오래된 정자나무가 있었다. 장정 다섯 명이 팔을 뻗고 둘러서야 닿을 정도로 커다란 소나무였다. 수령이 적어도 500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올렸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재물로 제를 준비했고, 제를 올리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려는 준비작업도 벌였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나무는 죽어버렸다. 기록에서는 1988년이라고 적고 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수명이 다 됐거나 병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그 자리에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 잘 보면 새로 심은 소나무는 쑥쑥 자라서 제법 멋이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비가 많이 내려 하천은 물론 주변이 쑥대밭이 된 적이 있는데, 주민들은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003년 8월3일이었다. 마을에서 기우제를 올렸던 ‘우제바위’가 불어난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 가뭄이 들 경우 온 마을 사람들이 가서 제를 올렸는데 그러면 그날엔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떠내려갔으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몇몇 주민들은 정자나무의 죽음에 이어 우제바위까지 떠내려가 마을이 쇠퇴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도 하고 있었다.
  

▲ 부곡마을 풍경
◆절이 있던 ‘절골’
부곡이란 마을은 예전에 ‘절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해 김씨와 낙안 김씨 등이 정착하면서 이뤄진 마을인데, 마을 자리가 절터라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후 강씨들도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번창했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지금의 ‘부곡’이란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은 풍수지리상 배의 혈이라고 한다. 이런 혈은 물이 있어 배가 뜨는 형세가 돼야 마을이 크게 발전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마을엔 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배가 뜨지 못해 마을이 쇠락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마을 역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마을이다. 얼마나 풍요로웠으면 마을 이름에 ‘부(富)’라는 글자를 사용했을까 짐작해본다. 한때는 40호 정도가 살아 상당히 북적였던 마을인데, 지금은 일곱 가구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문창순(64)씨는 “우리 마을이 동향면과 장수군을 잇는 길목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라며 “지금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 마을 공동작업장에서 고추를 선별하고 있었던 강호동씨
◆도로가 마을 숲 해쳐
이 마을 입구에는 예전부터 숲을 조성해놓았다. 수구막이로 조성한 느티나무 숲인데, 그 가운데는 장정 몇 명이 둘러싸야 손이 닿을 정도의 커다란 정자나무도 있었다.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잘 가꾼 훌륭한 숲에 감탄했을 정도다.

그런데 마을에 도로가 나면서 상당수의 나무가 뽑혔다. 도로를 내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정자나무도 이때 뽑혔다.
그래도 당시의 마을 숲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는 야트막한 산을 중심으로 여러 고목이 서 있는 숲을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여름이면 이 숲을 애용한다고 한다. 아무리 더워도 숲에만 들어가면 땀이 식을 정도로 시원하기 때문이다.

이 숲에는 또 돌장승으로 보이는 바위 하나가 서 있다. 본래 마을 입구 숲에는 돌탑이 있었는데 새마을사업 때 돌탑을 없앴다고 한다. 지금 서 있는 돌장승은 그 뒤에 마을에서 세운 것이다.
  
◆곳곳에 돌 캐낸 흔적
고무정과 부곡을 돌아보다 산을 깎아낸 곳을 여러 군데 볼 수 있었다. 모두 돌을 캐내던 곳이다.
이 인근 지역 산에서는 차돌과 석회석 등이 많이 나 일찌감치 돌광산이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고무정과 부곡에 많이 살았다.

부곡의 경우는 마을 숲이 조성된 마을 산에서 차돌을 캐겠다는 사업자가 나타나기도 했었단다. 당시 마을에서 발파 등으로 해를 입을 수 있어 반대해 결국 사업자가 광산 조성을 포기했다.
한참 호황기를 맞았던 인근 광산들은 최근 몇 년 사이 값싼 중국산 돌이 수입되면서 하나 둘 문을 닫았다.

한 10년 전쯤으로 주민들은 기억했다. 지금도 당시 캐낸 돌을 가공하던 시설을 볼 수 있는데, 녹슬고 낡은 채 버려진 모습이 흉물스럽다.
돌을 캐냈던 곳은 일부 복구공사를 해 놓은 곳도 있었고, 아무런 손도 대지 못한 채 버려진 곳도 있었다. 일부 광산 지역은 수직으로 돌을 캐내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게 한다.
  

▲ 고무정과 부곡 인근의 버려진 돌광산
◆인근은 군사작전 지역
고부마을 인근은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마을에서 보이는 산 곳곳에서 빨치산과 국군의 대규모 교전이 있었는데, 당시 국군은 한 개 사단이 투입돼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하도 외진 곳에 있어 큰 고통 없이 넘길 수 있었는데, 전쟁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 공포의 시기였다.

이후에도 이곳은 꾸준히 군사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고무정과 부곡, 장수군을 잇는 도로는 사실 군사용 비포장 도로로 먼저 닦였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단다.
  

▲ 고무정이란 마을이름의 유래가 담긴 마을정자
◆진안도, 장수도 ‘나몰라라’
고무정과 부곡 모두 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수군과 인접해 있다. 그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농경지가 장수군 안에 꽤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안군과 장수군 모두 이들 주민의 농사활동을 지원하는데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진안군에서는 농경지가 장수군에 속하고 있으니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고, 장수군에서는 진안군 사람들이니 지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다른 마을과 달리 인근 농경지를 잇는 농로가 대부분 포장되지 않아 기계를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지방세고 무엇이고 거둬 가는 것은 1등이고, 지원하는 것은 꼴찌라니까?”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의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산이 많은 곳이어서 매년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멧돼지는 물론, 노루와 토끼까지 농사만 지어 놓으면 농경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기 일쑤다. 사회적으로도 농사지으며 살아가기 힘든데, 산짐승까지 날뛰니 주민들은 한숨만 는다.
“매년 농사지어 산짐승 먹이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할 줄 아는 게 농사밖에 없으니 그냥 농사지을 수밖에요.”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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