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24) 동향면 신송리(2)…호천마을
표주박 모양 샘물 사라졌지만, 샘물처럼 맑은 사람들은 그대로
척박한 농사여건이지만 청정 환경 덕 타지 사람 속속 들어와

▲ 마을 뒷산에서 바라본 호천마을 모습
동향면 신송리 호천(狐川)은 과거 마흔 가구가 넘게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지리적으로 장수면과 경계를 이루며 길목을 차지하고 있어 사람의 왕래도 많았던 편이다. 지금도 마을에 가면 예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주택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주택 가운데 상당수가 비어 있다. 일부는 농자재 창고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손을 데지 않아 무너지기 직전인 집들도 꽤 있었다.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은 열네 가구에 서른 명 남짓이다. 물론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노인 인구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노후를 위해, 건강을 위해 마을로 이사 오고 있지만, 아직 그 수는 많지 않다.

마을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돈 있으면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이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 좋은데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 때문에 늘 삶이 힘겹다고 말한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다른 마을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 '호천'이란 마을 지명이 우래한 샘물.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은 후 간이 상수도로 바꿔좋아 본래 모습을 볼 수 없다. 다만 예전의 좋은 물맛은 그대로이다.
◆졸졸 물 흐르는 마을
 ‘호천’이란 지명은 마을에 표주박(瓠) 모양의 돌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해 붙인 이름이다.
본래는 ‘쇠용골’이란 이름으로 불렸다는데, 일제 강점기에 지명이 한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호천’이 됐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여시골’이라고도 부른 기억이 난다고 하는데, 험한 산세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여우가 서식했을 가능성도 큰 것 같다.

마을 지명이 유래한 표주박 모양의 돌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마을 한가운데 광장 위로 예전에 공동우물이 있었다. 그러다 마을에서 더 편리하게 생활용수를 이용할 수 있도록 우물에 관을 심어 산 위에 있는 탱크로 물을 보낸 뒤, 산수도 관을 통해 각 가정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물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려 더는 표주박 모양의 돌이 있는 우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 마을 물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시원하고 맛도 좋아요. 게다가 우리 마을은 공기도 좋아서 아픈 사람이 들어와 살면 몸이 건강해져요. 정말 살기 좋은 마을이에요.”
호천마을 서병열(71) 이장 부인 최임연(65)씨의 이야기다. 집앞 마당에서 가지를 손질하고 있던 최임연씨는 손짓을 보태 우물과 주변 지형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말 살기 좋은 마을인데,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돈 있으면 살기 좋은데 말이죠.”

◆척박한 자연환경
“우리 마을 주변 산을 보면 한참 위까지 경작했던 흔적이 남아있어요. 그만큼 척박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없으니 묵고 있는 밭이 수두룩해요.”
최임연씨와 이야기를 마칠 때쯤 서병열 이장이 들어왔다. 마침 갈 곳이 있어 준비하러 들렀다고 했다.

“원래 우리 마을은 은진 송씨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떠나고 죽고 해서 서너 집만 남았고, 나머지는 전부 각성바지예요.”
서병열 이장은 마을에 주민 수가 계속 줄어드는 것이 여간 안타깝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한 때 마흔 가구가 넘었던, 인근에서도 가장 큰 마을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렇게 쇠퇴한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농로포장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예전보다는 농사짓기가 좋아진 것이다. 워낙 경사가 급한 곳이 많다 보니 이전에는 농기계로 농사를 짓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우리 마을이 사실 농사를 짓기에 그리 좋지는 않아요. 산과 산 사이가 좁아 들이 없고, 산 중턱 밭에는 돌이 많거든요. 게다가 일할 사람까지 없으니 점점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 산제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거진 수풀속의 널찍한 공간과 평평한 바위 등이 산제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아랫쪽 고부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면서 산제당이 사라졌다고 적고 있다.
◆산신제 지냈던 무제바위
마을 뒷산에 올라 주변을 관찰하던 중 김계순(53)씨와 김씨의 친정어머니 조오목(77)씨를 만났다. 더 위쪽에 있는 고추밭에 가는 길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산제를 지냈던 곳을 묻자 바로 자기네 밭 위에 있다고 해 함께 밭까지 갔다.

“제가 시집 온 지 30년이 넘었는데 산제 지내는 것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러니까 그전부터 산제를 지내지 않은 것 같아요.”
고추밭에 도착해 김계순씨와 조오목씨가 손으로 산제당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나무와 덤불로 우거진 곳이었는데, 그 안에 마을에서 산제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했다.

밭고랑 사이로 걸어 산제당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덤불 사이로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쪽은 비교적 널찍한 공간이었다. 뒤로 병풍처럼 커다란 바위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성인 여러 명이 절을 올릴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몇몇 크지 않은 평평한 바위는 제기를 올려놓기 좋아 보였다. 
그런데 기록에서는 주민들의 얘기와 조금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산신제는 밤나무와 바위, 그리고 샘이 있었던 곳에서 지냈는데, 마을 뒤 고무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날 때 도로 터에 편입돼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 마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산제를 지내던 곳 아래에 넓이가 5∼6m 정도 되는 무제바위에서 기우제가 진행됐다는 것이다.
장소가 어디든 지금은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전통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늙고, 사람이 줄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 마을 오른쪽 골짜기로 올라가는 농로 바로 옆에 서 있는 호랑이 바위다. 길쭉한 모양의 이 바위가 왜 호랑이 바위라고 불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마을 장승과 같은 구실을 했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다.
◆호랑이 바위 ‘어흥’
호천마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호랑이 바위’, 또는 ‘호랭이 바우’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길 옆에 가만히 홀로 서 있는 이 바위는 수풀과 나뭇가지, 농자재 등에 가려져 있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바위 모양은 마을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뾰족하다. 끝이 뾰족하다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모양이 길쭉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왜 이 바위가 ‘호랑이 바위’라고 불렸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다.”라고만 답해줄 뿐이었다.

언뜻 위치와 모양 등을 봐서는 이 바위가 장승과 같은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골짜기 방향으로 난 길은 과거 장수군과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래서 호랑이 바위가 서 있는 곳이 호천마을의 또다른 입구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박승갑(왼쪽)씨네 집에서 마을 주민들이 수확해 말린 붉은 고추를 다듬고 있다. 올해 오랫동안 비가 내려 고추 수확량이 크게 줄어 든 것은 물론,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성 있는 고추를 건지는 것이 힘들어졌다.
◆농촌 위한 대책 필요해
박승갑(63)씨네 집에 남자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말린 고추를 다듬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올해 비가 많이 와서 그렇지 뭐.”

박승갑씨는 한숨을 쉬었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 놓으면 비가 많이 오거나, 산짐승이 짓뭉개서 1년 노력을 허사로 만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을을 떠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요즘 농산물 가격은 계속 내려가고, 기름값은 계속 오르잖아요. 그러니 어디 농사지을 맛이 나겠어요?”

▲ 호천마을 경로당이다. 요즘은 한 해동안 농사를 지었던 것을 수확하느라 바빠 이용하는 주민들이 없지만, 이제 찬 기운이 강해지면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많이 애용될 것이다.

▲ 마을약도

▲ 산제당 아래 고추밭에서 일하는 조오목씨

▲ 밭에 가는 최임연씨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