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1)
윤영신(서울타임스 회장)

위서(魏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壇君) 왕검(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 날에 환인(桓因;하늘,하느님.) 제석(帝釋: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 임금)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이하의 아들)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다스리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危太白山)을 내려다보니,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 이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신의 위력과 영검한 힘을 보여주는 신성한 물건. 거울, 칼, 방울로 추측된다.)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지금의 묘향산)의 신단수(神壇樹)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늘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기 3.7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 할 상대가 없음으로, 항상 단수(壇樹)아래 축원하여 잉태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결혼하였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가 곧 단군(壇君) 왕검(王儉)이다.

천제(天帝)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서 인용하였거니와 이렇게 조선의 건국신화 인 단군신화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서는 기록이 빠져 있는 것은, 당시 조정과 저자의 지나친 사대사상(事大思想)의 영향 이였음을 간과(看過) 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일제(日帝) 36년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거치면서, 단군의 존재가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여왔고, 계속하여 그와 같은 가치를 유지하려는 민족혼(民族魂)을 말살 시키려는 그들이 단군을 아예 부정하고, 관련 자료를 분서(焚書)하여 없애고, 단군의 실재를 부정하여 신화라고 날조한 그들 식민사관 학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단군왕검의 유적으로 남한 지역에서는 강화도 첨성대가 단군이 세 아들인 부우, 부소, 부여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 단군의 가족사항과 고조선의 구체적인 강역(疆域)들, 고조선의 동호정벌 기록과 반란 기록 등, 고조선의 역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된 문헌들이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붕괴되기 직전까지 실재하였던 흔적들을 찾아내는 활발한 연구가 남,북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음을 강조한다.

한편 삼국유사와 함께 단군기록으로 남아있는 「제왕운기」단군본기(檀君本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여 본다.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서자인 웅(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 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 (鬼)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가 바로 단웅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 조선지역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계이다. 1,03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 산(阿斯達 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함에 있어 삼국유사에서는 단(壇;제단)으로 단군을 기록하고 있고, 제왕운기에서는 단(檀;박달나무)으로 기록하여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배달」의 어원은 「밝달」은 「밝땅」곧 「밝은 땅」이다.

단(檀)의 훈(訓)을 빌어 「밝달」로 표시했으며,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도 그렇게 단군(檀君)으로 나타낸다. 비로소 문명의 씨앗을 뿌리고 세상을 열어(開天) 두루 밝혔던 단군조선의 강토(疆土)는 한반도의 좁은 그 땅덩어리가 아니고 시베리아 벌판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륙 이였음을 흔적(痕迹)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였고,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였으며,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으로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師;1伯,2師), 6사(事)체제로 이루어진 통치체제는 대체적으로 단군의 장자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다. 중국의 역사가 300년이상 지속된 나라가 없었으나, 단군조선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단제(檀帝)가 성인(聖人)이였으며 군신(君臣)간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 단군(後 檀君) 시대
여느 역사가 그러 하였듯이 욕망이 충천하여 개인적인 이합집산이 많아지고 말기에는 반란까지 일어나고 그 시기는 이미 성인(聖人)이 실제로 정치 할 수 있는 시대, 천시(天時)는 끝이 난다. 너무나 욕심으로 어지러운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이치대로 하자면 그러한 시기는 강력하고 세속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47대 마지막 고열가(高列加) 단군은 어질고 순하기만 하였다고 기록은 이야기 한다. 그는 영적인 눈으로 새로운 천시가 2000년 후에나 돌아 올 것을 보고, 기원전 238년 3월 아사달 산으로 돌아간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와 함께 큰 부(富)도 누렸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며 200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끝에 사람들은 사치해지고, 나태해지고, 게을러졌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빠져 살게 되었으며, 그들의 이기심은 끝이 없었다. 본래 단군조선의 방대한 강역은 후기에 들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중 진조선은 단군의 직할 통치구역이였고, 번조선, 막조선은 비왕을 두어 간접통치 했었다.

진조선은 기원전 238년 고열가 단제의 폐관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간다.
번조선은 기원전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의 책략에 멸망한다.
막조선은 기원전 238년 35대 비왕 맹남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단재 신채호(1880 ㅡ1936)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한강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마한, 진한, 변한의 남삼한(南三韓)을 세웠음을 밝혀냈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