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7) 동향면 신송리(마지막)

▲ 동향면 신송리
동향면 신송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마을 안누룩골(내유). 누룩나무(느릅나무)가 많고 안쪽에 있다고 해 ‘안누룩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예전, 이 마을은 50여 가구가 살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었다. 사람이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벌이도 괜찮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없었단다. 마을에는 뜨내기가 아닌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주막도 있었다.

▲ 동향면 신송리
몇 년 전만 해도 신송리에는 이런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신송리가 동향면에서 가장 주민이 많기 때문에 신송리 표만 얻으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에서도 안누룩골이 가장 인구가 많았다고 하니, 예전의 번성했던 마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마을은 점차 쇠락했다. 지금은 스무 가구가 조금 못되고, 한 가구에 노인 한두 명이 사는 게 일반적이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님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또 힘겨운 도시 생활을 벗어나 사람냄새 물씬 나는 정겨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렇다.

▲ 마을 바깥에 있는 옛날 방앗간. 문을 닫은지 오래 됐지만, 안에 있는 기계는 그대로 있었다.
◆문 닫은 방앗간
안누룩골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향면 소재지에서 장수군 천천면으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다, 두 갈래로 나뉜 길 가운데 왼쪽 길로 들어가면 바로 안누룩골이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는 오른쪽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뒤로 쓰러져 가는 방앗간이 보인다. 녹이 슬고 지붕과 벽이 떨어져 나간 이 방앗간은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다.

본래 안누룩골에는 마을 근처에 물레방아로 곡식을 찧는 방앗간이 있었다. 그러다 방앗간을 운영하던 사람은 새 기술이 접목된 최신 방앗간을 짓기로 하고 이곳에 방앗간을 지었다고 한다. 이전 방앗간과 달리 석유를 뗀 동력으로 작동하는 방앗간이었다. 하지만, 쇠락하는 농촌 현실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게 날로 어려워졌고, 결국 방앗간 문을 닫아 지금까지 왔다. 지금도 이 방앗간을 잘 들여다보면, 예전에 사용했던 기계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방앗간을 둘러보다 보면 ‘癸丑生九人田...(계축생구인전...)’이라고 새겨진 비석 하나를 볼 수 있다. 비석의 1/3 정도를 수풀이 덮고 있어 나머지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데, 비석 외관이나 글자의 마모 정도를 봐선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를 전하는 기록이 없어 유래를 알 수 없고, 글자의 뜻만 가지고 미루어 짐작하면 ‘계축년에 태어난 아홉 명이 밭에서 무언가를 했다.’ 정도로 추리해 볼 뿐이다. 

또 길이 갈리는 부분에 있는 커다란 비석도 눈에 띈다. 이 비석은 인근에 들어선 절에서 얼마 전에 세운 것이다. 사람 키보다 훨씬 커서 조금 위압감이 든다.
  

▲ 동향면 신송리
◆부서진 돌다리
방앗간을 지나 조금만 들어가면 안누룩골이다. 빨간 버스정류장이 마을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더 들어가면 지난 호에 소개한 수침마을이다.
이곳 버스 정류장 뒤로는 논밭이 넓게 펼쳐 있다. 일찌감치 추수를 끝내고 짚단을 쌓아놓았다.

물길 하나가 나 있다. 하천 양옆은 돌과 시멘트 등으로 제방처럼 쌓아 놓았는데, 최근에 공사를 했는지 깨끗하다. 멀리 산 위로 향하는 길이 보이고, 그 길과 이어지는 교량도 하나 보인다. 이 교량 역시 새것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이 하천에는 돌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다리였던 모양이다. 이 다리는 지금의 도로가 나기 전에 수침으로 가는 길이면서,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하천을 건너는 통로였다.

또 모양이 얼마나 좋았는지, 가끔은 타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와 돌다리를 구입하겠다며 수백만 원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마을에서는 소중한 돌다리를 팔 수 없다며 거절했고, 이후에 이 돌다리를 마을 안쪽으로 옮겨놓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돌다리는 지난해 수해복구 공사가 진행되면서 부서졌다. 지난해 수해가 발생해 복구공사가 진행됐는데, 공사에 방해가 된다며 중장비로 이 돌다리를 부순 것이다. 마을에서 공사 관계자들에게 따져봤지만, 이미 끝난 뒤였다.
  

▲ 마을 초입에 있는 거북바우. 누군가 밑에 있던 바위를 바꿔치기해 놓았다고 한다.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
돌다리뿐만이 아니다. 안누룩골에는 오래전부터 마을의 수구막이 구실을 하는 돌탑이 있었다. 이 돌탑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무너졌는데, 이후에 마을에 안 좋은 일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탑거리’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또 마을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오른쪽 아래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예전의 바위가 아니라고 한다.

‘거북바우’라고 부르는 이 바위는 마을 앞을 향해 서 있는데, 화재를 막는 수호신 구실을 한다. 본래 이 바위는 아래쪽에 모양이 특이한 커다란 바위 위에 있었는데, 10여 년 전 그 바위가 바뀌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한 주민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 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단속했는데, 거북바우 아래 있던 바위가 참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라며 “한밤중에 누군가 그 바위를 퍼내고, 대신에 엉뚱한 바위를 얹어 놓았다.”라고 안타까워했다.
  

▲ 마을 약도
◆골짜기 안 길게 늘어선 마을
마을은 높지 않은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길게 늘어서 있다. 마을 초입에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집이 몇 채 보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을회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주거지가 나타난다. 신송리의 다른 마을에 비해 주택이 많아 보이지만, 빈집이 꽤 많다.

마을 안길은 골짜기를 따라 계속 이어진다. 예전에는 절골과 백암(장수군 계북면, 예전 행정구역이 조정되기 전에는 신송리에 속한 마을이었다.)으로 넘어가는 길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당시에는 산 중턱까지 밭을 일궜기 때문에 마을의 중요한 농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앞쪽과 바깥쪽으로 도로가 나면서 고갯길은 사용하지 않는다.
  

▲ 볍씨를 말리고 있는 홍종옥씨. 홍씨는 농사 지어 남는게 없다며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마을 사람들
최근 마을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 부모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마을을 찾았을 때 만난 김석홍(62)씨 역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마을에서 세 번째로 젊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3년이 됐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뒤를 이어 농사를 지으려고요.”
김석홍씨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지내다 고향을 지키려고 귀향했다. 어지럽고 힘겨운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에서 새 희망을 일구기 위해서다. 벼농사와 산삼(산양삼을 이야기한 것 같다.)재배가 그 희망의 출발점이다. 그런 김석홍씨에게 고향의 모습은 참 안타깝기만 하다. 예전의 북적거리고 잘 살던 마을의 모습이 더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 안쪽 조그만 비닐하우스에서 소나무를 꺼내는 김정갑(76), 박행연(74)씨 부부도 만났다. 땔감으로 쓸 장작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김정갑씨가 전기톱을 켜더니 능숙하게 일정한 크기로 잘라냈다.
“맨 노인들만 남았지. 옛날엔 한 집에 적으면 다섯 명, 많으면 열 명이 넘게 살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한 집에 한두 명만 살아. 빈집도 많고.”

마을 골목 골목을 둘러보다 비닐하우스 안쪽에서 콩깍지를 따고 있던 김복래(68)씨를 만났다. 김씨는 자녀를 공부시키면서 겪었던 온갖 고생을 이야기해주었다.
“아들 셋하고 딸 하나를 뒀는데, 지금은 모두 잘 됐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 동향면 신송리
김복래씨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고된 노동을 견뎌냈다고 한다. 당시 자녀가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함께 지냈다. 그리고 남편은 안누룩골에 머물며 농사짓고 소를 키우며 뒷받침했다. 하지만, 늘 돈이 부족해 김씨는 각종 공사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지금 전주에 있는 아파트 단지 몇 개는 김복래씨가 세운 것이라는 농담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아이들을 공부시켜 모두 좋은 직장을 잡았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거리가 남았다. 한의대를 나온 아들이 결혼하고 10년이 되도록 아기를 갖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뒤늦게나마 아기가 생겼지만, 병원에서는 아기와 산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았던 손자는 기적적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지금은 건강하게 자라며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손자가 어찌나 예쁜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단다.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데, 전화해서 손자를 보고 싶다고 하면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열일 제쳐놓고 내려와요.”

그러면서 김복래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해졌다. 정말 세상의 근심이 모두 사라진 얼굴이었다.
“자식들이 자꾸 서울에서 살자고 하는데, 아파트에는 하루를 지내기도 힘들어요. 영 징역 사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우리 마을에서 지내는 게 좋아요.”
  

▲ 겨울동안 사용할 뗄감을 준비하는 김정갑, 박행연씨 부부. 김정갑씨의 톱질이 아주 능숙했다.
◆남는 것 없는 농사
마침 화창한 날씨에 벼를 말리고 있는 홍종욱(73)씨를 만났다. 홍종욱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벼 농사 한 마지기 지으면 얼마가 남는 줄 아느냐고.

“트랙터로 논을 가는데 한 마지기(660㎡)에 5∼6만 원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 마을처럼 경사가 있고 논이 좁으면 6만 원에도 하지 않으려 해요. 또 모를 심는데 마지기 당 3만원, 타작하는데 마지기 당 4만 원, 여기에 농사를 짓는데 들어가는 비료와 농약값이 3만 원이에요.”

모두 따져보니 660㎡에 벼농사를 짓는데 16만 원가량이 들어간다. 한 마지기에서 보통 콤바인 포대(30kg)로 7개가 나오는데, 올해는 날씨와 목도열병 때문에 5개밖에 수확하지 못했단다. 따져보면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5만 원이다. 피땀 흘린 대가치고는 너무 적다.

“옛날엔 직접 쟁기로 논을 갈고, 모를 심었기 때문에 일당이라도 건졌지. 하지만, 나이가 드니 기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사람을 쓰면 이렇게 돼.”

홍종욱씨의 열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농촌 전체의 문제이다.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영세한 농민들의 처우를 어떻게 개선할지 정부가 더는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자 양반. 저것 좀 얘기해줘요.”

홍종욱씨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얘기했다. 마을 앞쪽 뜰에서 하천 수해복구를 하면서 길을 내지 않아 안쪽에 있는 논으로 기계가 다닐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는 코앞에 있는 거리를 산 중턱까지 난 길로 돈 다음, 남의 논을 통과해야 했단다. 기계가 지나가기 전 논 주인에게 간신히 허락을 얻어냈다.
“복구도 좋지만, 주변 상황도 감안해서 공사를 해야지. 괜히 돌다리까지 부숴놓고 말이야.”    

▲ 콩깍지를 까고 있는 김복래씨. 공부 잘해 성공한 자녀들과 늦게 본 손자 덕에 행복하다.

▲ 동향면 신송리

▲ 동향면 신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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