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3>
윤영신 서울 타임스 회장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B.C.58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홀승골성(?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지방)에 오룡거(五龍車;천자가 타는 수레)를 타고 내려 와 도읍하고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하여,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기도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는데 하루는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큰 못, 여기서는 백두산 천지를 가리키는 듯함.)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지라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들어 올리게 하였더니, 거기에 금 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애가 있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라 하며 왕이 기뻐하여 아이를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삼았다. 왕 해부루의 상신(相臣) 아란불(阿蘭佛)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른다.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거라. 동해의 바닷가의 가섭원(迦葉原;강원도 명주군으로 추정)으로 가거라. 그 곳은 땅이 기름지니 가히 왕도를 정할만한 곳이니라” 하였다.

아란불이 해부루 왕에게 권고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여기 장차 세우려는 그 나라는 주몽(朱蒙)이 졸본주(卒本州;桂婁,또는 忽本.)에 도읍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이룩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해모수는 천제로서 부여를 세웠으며 그 성을 해(解)라고 삼았고 그 아들의 이름은 부루 라고 한다.’
즉 해모수는 부여를 세웠고, 아들인 해부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리고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에서는 그 기록이 삭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부루는 아들로 금와를 얻었고 얼마 뒤 해부루는 해모수가 세울 나라 때문에 가섭원으로 쫓겨나게 되고, 그 자리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는 우리 상고사(上古史)의 미스테리가 이렇게 하여 일어났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인 광개토대왕비나 《위서(魏書)》에서는 해모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하다.

《국사》고려본기(高麗本記)의 기록에 보면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갔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 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가 금와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이다. 천제의 아들을 자칭한 해모수가 웅신산(熊神山)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유인해서, 정을 통해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는 내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이곳에 귀양을 보냈다” 하였다.

금와 왕이 그녀를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엇더니 피하는 그녀의 몸에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크기가 다섯 되들이 말(斗)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길가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해갔고,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 보호하여 주었다. 왕이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깨어지지도 않았다. 결국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부드러운 천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마침내 껍질을 부수고 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주몽(朱蒙)이다.

해모수와 유화의 만남, 주몽의 탄생과 성장, 주몽의 비범성과 영웅성. 그리고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 관하여 신화 속에 숨겨져 있는 의문의 미스테리들을 풀어 밝히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역사(歷史)는,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는 그래서 우리가 그 진실(眞實)을 찾아서 간직하고, 어려워도 배워야 하는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