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원종택씨
원 종 택 씨
상전면 월포리 대구평(大邱坪)마을 출신
신길공업사(자동차3급부분정비)대표
신길상사(만도R.B대리점)대표
경기도 자동차부분 정비사업조합 수석감사
경기도 자동차부분 정비사업조합 안산지회장
방범기동순찰대 원곡본동지대장

인간이 고향에 대하여 갖는 그리움의 정서는 가장 근원적이며,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깊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낀다. 거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안식처로 또는 인간존재의 근원으로 어머니의 품속을 대신하는 큰 우주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거기 우리의 귀향회귀(歸鄕回歸) 본능을 간직한 추억의 아련한 정서가 있는 것이다. 수몰 속에 사라진 고향의 언덕에 앉아서 추억으로만 간직된 그 고향의 뒷동산, 그리고 맑게 흐르던 앞 냇가의 어른거리는 이야기들을 원종택씨는 잊을 수가 없다.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듯 한 재잘대는 옛 벗들의 되살아나는 음성들도 지금 물속에 사라진 고향의 음영(陰影)들과 함께 원종택씨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고향이 있다 해도 추억에 안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상실감 짙은 허망함을 그는 알고 있다. 넘실대는 용담댐 물결넘어 집 안의 조상들을 모신 선산(先山)만이 변하지 않은 추억으로 그의 가슴을 채워 온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강 바람은/산 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 울멍 떠내려 간다/
진 종일/나룻가에 서성거리다/행인의 돈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려/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 하랴/양귀비 끓여다 놓고/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히 잣나비 우는 산 기슭에는/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설레는 바람이 가랑 잎을 휩쓸어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오장환 시인의 향토망경시(鄕土望景詩) 한 토막을 머리에 떠 올리며 멀리 하늘에 떠 가는 하얀 뭉게구름에 마음을 적신다. 스산한 설움이 온 몸에 스쳐간다.

원종택씨는 아버지 원민희(78세.용평리거주)씨와 어머니 조인순(76세)여사 사이에서 1954년 6월 15일 3남3녀 중 장남으로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진 월포리 대구평(大邱坪)마을에서 태어났다. 상전초등학교, 진안중학교, 전주영생고등학교를 차례로 마치는 동안 상전농협의 조합장을 역임하신 부친의 은덕에 힘입어 구김살 없는 어린 시절을 세상물정 모르면서 살았노라고 그는 그렇게 회고 한다.

필자가 그와 만나는 짧은 시간동안 월요일 오전의 사업상 걸려오는 많은 전화내용을 훔쳐 들으며서, 그가 갖고 있는 일단의 성격을 짚어본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과 자상함을 함께하는, 목적과 상황에 따라서 뛰어난 집중력을 소유한 사람인듯 싶었다. 어쩌면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갖춘 행동파 인생의 창조적 사고방식의 사람인듯도 하였다.

그는 자신을 자평(自評)하기를, 살아가는 의미를 한곳에서만 찾지 않고 다른 모든 주위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하였다. 어려운 일의 해결사역도 자임하며, 초면의 사람과도 경계를 별로 두지 않고, 비교적 빨리 친해지는 팔방미인(八方美人)형이라 하였다.

1971년에 상경하여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기계부에서 2년여간 근무하였던 원종택씨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새마을금고 진안군지부 지도과장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부모님을 도와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한다. 그리고 진안에서 중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던 박순자(진안읍.51세)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한다.

원종택씨가 자신의 현 위치를 바라보고 그리고 자신의 앞날을 짚어보며 고민하며 내린 결론은 현재의 탈출이였다고 회고하면서 그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지나간 30년은 참으로 긴 여정(旅程)이였다. 인고(忍苦)의 잊혀지지 莩헇긴 세월이였다.

1980년 다시 상경하여 그가 정착한 곳이 안양.
3년간의 원효세차장을 운영하였던 그 세월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두 차례의 엄두도 낼수 없었던 그 사고(事故)의 악몽(惡夢)은 그가 이 세상을 다시 배우는 찰나였다.

전세로 시작했었던 신혼의 시작은 월세로 내려앉았고, 어린 나이로 그에게 시집와서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아내는 함께 절망하지 않고 다시 직장을 나가면서 그를 격려하여주었던 그 사랑을 그는 지금도 아내에 대한 고마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불광동의 자동차부품대리점에서 카운터 생활로 3년, 안산에 정착하고 신길밧데리로 1년, 그리고 조금씩 발전하여 지금의 자리에 신길상사로 간판을 갈아세우던 날,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지나간 20년세월의 설움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는 말한다.

성공이란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93년에는 안산시장이, 94년에는 연합회장이, 96년에는 도지부장이, 2000년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상을 주었고,2007년 11월 13일 육운의 날, 건설교통부장관이 그에게 공로상을 주면서 격려하였다.

우리의 고향사람 원종택씨.
20년간 길러오던 아들을 물놀이에서 잃고 애통하는 아내를 안고 애통하던 그 슬픔을 그는 잊지 못한다. 이제 하늘의 뜻을 알았음으로 그는 하늘을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아 갈 것을 다짐한다. 그는 인간을 용서하리라. 그렇게 다짐한다.

세상 속에서 그는 상대를 의식하고 배려하며 용서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강조한다. 그는 넓은 아량으로 사람을 사귀며, 강한 책임감으로 자기역할을 다 하며, 어려운 일에는 집념으로, 끈기와 인내를 다 하는 노력하는 우리의 고향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원종택씨 연락처: 011-216-3128)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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