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30) 주천면 신양리(3) … 금평(벌들)

▲ 금평과 성암을 잇는 다리. 지난 수해에 다리 가운데가 휘였다.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광석은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봉소는 농경지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그래도 금평마을까지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농경지도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하지만, 용담댐에서는 홍수 조절지에 들어간다면서 농경지를 대부분 사들였다. 그리고 금평의 농경지는 공원으로 조성됐다.

옛날 인삼밭이 빼곡하게 있던 이곳엔 ‘도화동산’이란 이름을 붙이고, 듬성듬성 앙상한 나무를 심어 놓았다. 금평마을 주민들은 마을과 붙어있는 도화동산을 바라보면 한숨만 난다.

그래도 용담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삼이 잘돼 주민들 모두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하루하루 돈벌이를 걱정해야 한다. 광석이나 봉소마을과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

▲ 신양리 중심에 있는 가장 큰 마을 금평을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모습.
◆금평으로 가는 길
금평으로 가는 길은 크게 세 갈래다.
하나는 주천면 소재지에서 성암마을을 거쳐 다리를 건너는 길이다. 문제는 지난 수해 당시 이 다리가 큰물에 밀려 한가운데가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차량통행 금지’라는 안내판을 다리 양끝에 세워놓았지만, 일부 자동차가 이 다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주 아슬아슬해 보였다.

다른 하나는 주천면 소재지에서 와룡암과 주천서원으로 가는 길로 들어간 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길 역시 쉽지 않은 길이다. 요즘에 이 길을 정비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가뜩이나 좁은 길이 더 좁아진 느낌이다. 맞은편에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으면 피할 곳도 마땅히 없다.

마지막 길은 도화동산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마땅치 않다. 현재 도화동산은 정식 개장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차량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 주천서원 쪽 길을 이용해 마을로 들어갔다. 최봉골이라는 산허리를 빙 둘러 들어간 마을이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 마을 약도
◆벌들, 벌담, 영남촌, 그리고 금평
신양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가구수를 보유한 자연마을이 금평마을이다.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현재도 30가구에 주민 60여 명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은 본래 들 가운데 있다고 해 ‘벌들’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그러다 1740년경에 은진 송씨가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마을이 이뤄졌다. 이후 마을에서는 지형이 물에 뗏목을 띄워놓은 형국을 하고 있다며 ‘벌담(筏潭)’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런데 이런 풍수 때문이었는지 실제 이 마을은 피난민들이 찾아 들어온 마을이 됐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서 송씨, 김씨들이 피난을 와서 정착했다. 아마도 왜구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로 이 마을은 ‘영남촌’이란 이름도 얻었다.

이런 마을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금평(金坪)’이란 지명으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을 지명에 ‘金(쇠 금)’이 들어간 이유는 이 마을 남쪽에서 쇠붙이가 났다는 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마을 남쪽에 ‘쇠바탕’(정확한 지명을 기억하지 못했다.)이란 지명이 있었고, 그곳에서 쇠가 났다고 전해들었다고 얘기해줬다.

▲ 김덕인씨가 김장을 담글 배추를 밭에서 뽑고 있다.
◆최봉골을 노리는 제천봉
마을 왼쪽에 ‘뒷산(최봉골)’이라고 불리는 낮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은 풍수상 여성의 음부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자천 건너편 성암마을 쪽에 우뚝 솟은 제천봉은 남근 형상이다.

이런 풍수 때문에 마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남근 형상의 제천봉이 여성 음부 형상인 뒷산에 부딪히려 했는데, 갑자기 뒷산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제천봉이 멈춰섰다는 이야기다.
얼핏 보기에도 제천봉은 뒷산을 향해 솟은 형상을 띄고 있는데, 옛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 도화동산 때문에 마을회관 옆으로 옮겨 지은 추양정.
◆마을 거리제 계속 이어져
금평마을 역시 신양리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거리제(길산제)를 지낸다. 마을에 정자나무가 없어 도화동산과 마을이 만나는 지점에서 제를 올리는데,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지낸다.
제주는 부정타지 않은 사람으로 정하고, 마을기금으로 비용을 마련해 유사가 음식을 장만한다. 제를 올릴 때는 거하게 풍물을 울리며, 마을 사람들은 한바탕 잔치를 열어 마을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한다.

◆수몰에 떠밀린 추양정
현재의 마을회관은 본래 있던 낡은 마을회관을 부수고 새로 지은 것이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끔하다. 마을을 찾아간 11월 마지막 주에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12월에 접어들면, 주민들은 이곳에서 따뜻한 정을 나누며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마을회관과 마을회관 뒤 비어있는 주택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정자가 숨어 있다. 정자를 이루고 있는 목재는 비바람과 풍파를 견뎌온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고, 지붕은 많이 낡아 패널로 덧대 보강했다. 현판에는 ‘추양정(秋陽亭)’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가을빛이 드는 정자’라는 뜻이지만 건물 사이에 끼어 있어 빛이 잘 들지 않는다.

사실 추양정의 본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마을 남쪽 농경지 쪽에 있었는데, 농경지가 홍수 조절지로 들어가면서 주민들이 옮겨 지은 것이다. 마을 노인들조차 이 정자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모른다고 하니 그 역사를 알 만한 정자다. 그래서 주민들이 소중한 이 정자를 어떻게든 보존하기 위해 옮겼다.

이렇게 추양정을 보존해 놓았지만, 정작 주민들은 정자가 필요하다. 추양정이 그늘지고 협소한 곳에 있어 정자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주민은 여름에 마을 노인들은 물론 주민들이 쉬거나 모여서 회의를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며, 마을 광장 한 곳에 정자를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김장을 담그는 김영숙(왼쪽)씨와 돕기위해 온 이웃 주민들.
◆인심 후한 주민들
집 마당이 북적댄다. 김영숙(58)씨의 집 마당에 주부들이 하나 둘 모여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했다. 김장이었다. 한쪽에는 절여놓은 배추가 잔뜩 쌓여 있다.

“늘 100포기도 넘게 담가요. 도시로 나간 자식들도 줘야 하고, 친정 동생까지 나눠주려면 100포기로는 어림도 없어요. 이렇게 많이 해서 나눠주는 게 시골 인심이고, 시골생활 아니겠어요?”

김씨의 말에서 후덕한 인심이 풍겨난다. 김씨는 기왕에 찾아온 손님이니 대접을 잘해서 보내야 한다며 안이 꽉 찬 절인 배추 하나를 가져다가 양념을 묻혀 맛을 보라고 권한다. 맵고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갓 담근 김장김치 맛이 일품이다.

옆에서 김장을 돕고 있던 이웃집 박금례(63)씨가 밥하고 같이 먹어야 맛있다며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했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가져온다. 이게 시골 인심인가보다.

양념 준비가 끝났을 때쯤 마을 주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몰려왔다. 본격적으로 절인 배추에 양념을 버무릴 모양이다. 이렇게 박금례씨의 집을 시작으로 서로 품앗이하며 월동준비 제1호인 김장이 금평마을에서 시작됐다.

▲ 주천 신양리 금평

▲ 주천 신양리 금평

◆“60대가 마을 청년이라오”
마을 바깥쪽 도화동산과 인접한 한 집. 담을 따라 토종벌통이 줄지어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벌통 입구에 토종벌이 잠깐 고개를 내밀고 나왔다가 다시 통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깥 추위가 어떤지 살펴보는 것 같았다.

이 집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주길남(66)씨의 집이다. 마을 주변 농지가 홍수 조절지로 수용된 후 이렇다할 소득원이 없는 이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 주씨는 정성껏 토종벌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벌이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토종벌이 몸집이 작아 양봉에 매번 당해요. 게다가 우리 마을 주변으로 밀원이 없어서 꿀을 많이 따지도 못하고요.”
그러면서 주씨는 도화동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게 뭐하는 짓이랍니까? ‘도화동산’답게 꽃이나 심으면 벌을 치는데 조금 도움이 되겠는데, 나무 몇 그루 달랑 심어놓고 공원이네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주길남씨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아마도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인삼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마을 사람들이 비교적 풍요하게 살았던 예전의 기억이다. 그렇게 잘 살던 고향 마을이 이렇게 쇠락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라에서 하겠다는데 힘없는 주민들이 무슨 수로 막겠어요. 데모도 많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됐죠.”

▲ 주천 신양리 금평

▲ 주천 신양리 금평

▲ 주천 신양리 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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