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32) 주천면 신양리(마지막) … 상성암(윗미래)

지난주 주천면 신양리 성암리에 있는 두 자연마을 가운데 하성암을 소개했다. 예전에는 상성암과 독립된 하나의 자연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성암마을로 주민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 주민들은 상성암에 있는 성암마을회관을 함께 이용했고, 상성암 주민들과 어울리며 지내고 있었다. 사실 두 마을을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번에 찾은 마을은 성암마을 가운데 규모가 큰 ‘상성암(윗미래)’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비교적 포근한 날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주민들은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했고, 마을회관에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제도 봤던 얼굴이지만 주민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마을 앞 정자나무와 정자. 공동창고 주민들은 이 앞 네거리에서 거리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별이 빛나는 암석지대
‘성암(星岩)’이란 마을명칭의 뜻을 들여다보면 ‘별과 바위’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은 단순히 마을 뒤로 보이는 ‘번개바우’를 비롯해 마을이 암석지대에 구성돼 있어 ‘성암’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생각했을 뿐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성암’이란 마을 이름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마을이름의 ‘바위’는 있는데 ‘별’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다 배골산 쪽에 한국방송(KBS) 중계탑이 생기면서 ‘저것이 바로 별이다.’라고 생각했단다. 중계탑이 세워지고 밤에 중계탑을 알리는 불빛이 깜빡이면서 동네 강아지들이 엄청나게 짖었더란다. 주민들이 나와서 중계탑을 바라보니 영락없이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조상님들이 저런 걸 미리 예감하고 마을 이름에 별을 넣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 송전탑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마을에서 걸렸던 현수막. 마을과 한전의 합의가 이뤄진 뒤로는 이렇게 말아둔 상태다.
◆리사무실이 있던 마을
상성암은 한때 60호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을 다녀보면 비교적 넓은 분지에 자리하고 있어 예전 마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웃한 신양리 중심마을 금평마을보다 호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신양리의 마을 업무를 관장하던 ‘리사무실’이 이곳 상성암에 있었다니 예전 상성암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마을에는 갑부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땅이 얼마나 많은지 진안군에서도 손으로 꼽는 땅부자였단다. 주민들은 그만큼 상성암이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잘 사는 그런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용담댐 건설로 농경지 대부분이 물에 잠기면서 마을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에 남은 것은 서른 집 정도인데, 그나마도 혼자 사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마을이 커서 ‘영세민’이 가장 많은 곳이 됐다며 자조 섞인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까지는 품팔이로 조금씩 벌어 생활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다며 이곳 사람들을 쓰지 않는다. 게다가 수몰로 농경지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자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얼마 없다. 그저 정부에서 주는 몇 푼으로 알뜰하게 생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지난주 소개했던 하성암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혼자 남은 여성 노인들이 많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민들은 마을 풍수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뿐이었다.
  

▲ 상성암에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골목 안전장치(?). 자동차 후사경을 걸어 두어 맞은편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살면서 안전이 최고
신양리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상성암 역시 ‘거리제’를 꾸준히 지내고 있다. 정월 초사흗날 저녁 6시에 하성암 주민들과 함께 지내는데, 지금 마을회관과 정자 사이 작은 네거리에서 지낸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행복을 기원하는 거리제였지만, 요즘에는 교통사고가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성격이 강해졌다고 한다. 요즘엔 어디를 가든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마을 길 한쪽 ‘십일거사기념비’
마을 길 한쪽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눈에 띈다. 비석에는 큰 글씨로 ‘십일거사기념비(十一居士紀念碑)’라고 새겨놓았다. 1938년에 세운 이 비석은 근방(신양리와 주양리)에 살던 선비 11명이 수계(修契: 선비들이 학문과 심신을 닦기위해 맺은 모임)하여 세운 비라고 알려졌다. 이런 비석의 유래를 통해 주민들은 상성암이 많은 인물이 나온 곳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 사진에서 보이는 인삼밭 뒤쪽이 신양리 옹기점요지이다. 여러 기록에서는 신양리 일원에 가마터가 많았다고 전하는데, 금산과 이웃해 있는 지역 특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릇 만들던 가마터 흔적
신양리와 관련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옹기점 요지에 관한 이야기를 여럿 접할 수 있다. 금산군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토양적 특성 때문에 여러 옹기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양리 곰뱅이 요지는 신양리와 인접한 미적마을 입구 부근에 있다. 미적마을 입구 음식점 뒤에 두 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발굴 당시 많은 16∼17세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편과 요도구가 수습됐다.

다음은 신양리 봉소 요지이다. 봉소마을 서북쪽에 있는 요지로 제주 고씨 묘지 옆에 있다. 묘역을 조성하면서 가마가 파괴됐다고 한다. 출토 유구는 곰뱅이 요지와 같은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상성암에 있는 옹기점 요지다. 이곳은 바로 아래가 인삼밭이 일궈지면서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역시 17세기 전후의 백자편과 요도구가 출토됐다.

이 밖에도 상성암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도 마을 인근 밭을 일구면 일부 도자기 조각이 발견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을 비추어봤을 때 신양리 인근이 그릇 제작산업이 크게 번성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 마을 뒤 산을 가로지르는 송전탑. 얼마전 마을에서는 송전탑에 따른 보상문제로 한전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최근 송전 철탑으로 홍역
지난 10월 상성암은 송전철탑 설치를 놓고 한국전력공사와 마찰을 빚었다. 당시 주민들은 “예전 철탑 설치 당시에는 주민들이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반대할 경우 한전에서 이런저런 보상을 해줬다.”라며 “전례에 따른 보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철탑 설치를 반대하겠다.”라며 한전과 대립했다. 그러나 한전의 중재안을 마을 주민들이 수용하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합의가 이뤄졌다.

이런 당시의 마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마을 곳곳에 있는 현수막이 그것이다. 지금은 모두 접어놓거나 말아놓아 문구를 볼 수 없지만, 당시 철탑 건설을 반대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들이었다.
  

▲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 올해 겨울에 접어들면서 마을회관이 문을 열고 난 다음날이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함께 밥을 지어먹고, 일도 하면서 추운 겨울을 포근하게 보낸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
마을회관 앞에서 상성암 노인회 총무를 맡고 있는 박화목(74)씨를 만났다. 상성암에서 나고 자랐고, 마을업무를 오랫동안 맡아 활동했던 터라 마을의 옛날부터 현재까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어서 박화목씨는 마을회관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마침 회관에는 마을 주민들이 여럿 모여서 멸치를 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침 어제부터 마을계를 열고 마을회관을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농사일을 비롯한 생활비 벌이에 바빴던 주민들이 봄부터 비어있던 마을회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주민들은 이곳에서 함께 어울리며 겨울을 나게 된다. 시골의 겨울은 마을회관이 문을 열면서 시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주민들이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며 메밀묵을 잔뜩 꺼내왔다. 박화목씨는 맥주를 한 잔 해야겠다며 맥주 한 병과 사발을 들고 왔다. 멸치를 다듬던 여성 주민들이 잠깐 일을 멈추고 메밀묵을 함께 먹으며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신양리의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다.

▲ 상성암에 있는 십일거사기념비

▲ 상성암에 있는 상성마을회관. 겨울이면 이곳은 마을사람들이 모이며 따뜻한 정을 나눈다.

▲ 마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박화목 노인회 총무. 글에는 쓰지 못했지만, 박 총무로부터 '남자의 인생'에 대해 한참 강의(?)를 들었다.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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