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6)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 제6(三國史記 高句麗國 本紀 第六)에 보면, 長壽弘濟好太烈帝改元建興仁義治國恢拓彊宇……又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干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장수홍제호태열제는 건흥(建興)이라 연호를 바꾸고 인의로서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군사의 수를 정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곡필(曲筆)에 연유하여 장수왕 재위연대의 또 하나 역사의 미스테리에 접하게 되지만 여기서 장수홍제호태열제는 장수왕으로 봐야 할 것이며, 백제 어하라(於瑕羅)는 소서노의 나라, 곧 비류(沸流)의 나라였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5세기 고구려 장수왕(A.D.413―491)때까지도 비류의 나라 이름이 남아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소서노는 골본부여(忽本夫餘) 고무서 왕의 딸이라고 삼국유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에는 `온조왕의 아버지 우이(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弩)이니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처음 우이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 우이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B.C. 58년경, 골본부여의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껴 과부가 된 딸 소서노와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소서노 설화에 대하여는 분분한 이견들이 많지만, 삼국사기의 주몽설화를 인정하는 측면에서 소서노 설화를 인정하는 쪽도 있으므로 소서노에 관하여는 계속하여 역사속의 여인으로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서노와 주몽은 세력을 키우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구려 초기 그 중심세력의 변화에서 계루부와 소노부와의 갈등에서 이런 저런 변수가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소서노는 토착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데 그 역할을 다 하였다. 그때까지도 소서노는 자신이 전 남편 우이(優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비류(沸流)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무렵, 북부여(北夫餘)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 난 유리(琉璃)가 성장하여 주몽을 찾아오고, 주몽은 유리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한다.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소외감을 느꼈고 위기감마저 느꼈다.

비류는 자신이 비록 적자(嫡子)는 아니지만 맏이(伯)이고 또 고구려를 세우는데 있었던 자신들의 역할이 배반 당하는데 대하여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에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와 아우 온조(溫祚)에게 이른다.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家財)를 기울려 그 방업(邦業)을 도왔으니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이 우리를 배반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 있어 혹처럼 답답하게 지낼 것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땅을 가려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 하다.’하고 패수(浿水) 대방(帶方)의 땅이 비옥하므로 그 곳에 많은 땅을 사서 장원을 일구어 큰 부자가 되니, 그 땅이 10년 동안에 북쪽으로는 대수(帶水:하북성에 있음)에 이르고 반 1,000리의 땅으로 커졌다.

이때 소서노가 주몽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부(內附) 할 뜻을 밝히니, 주몽은 크게 기뻐하여 소서노를 책호하여 어하라(於瑕羅)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주몽설화가 그러 하듯이 소서노의 설화도 그러하다 주몽이 고구려로 국명을 바꾸고 영토를 확장할 때 소서노는 졸본부여 왕가의 재산을 털어 군비를 확충 고구려 확장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 후 주몽과의 사이에서 온조를 낳고 온조를 태자로 칭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후 주몽을 찾아 온 유리로 주몽이 태자를 바꾸자 주몽의 배반을 느낀 소서노는 자신들을 경계하는 유리를 피해 온조와 비류, 그리고 옛 주몽의 참모였던 협보(陜父)와 그 외의 졸본 세력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는 기록도 있다.

협보(陜父)는 왜(倭)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고 후에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가 되어 백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며 왜와 백제의 오랜 동맹관계의 기틀이 된다. 이렇게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비류와 온조를 앞세워 십제와 백제 등 세 왕국을 건국하는데 관여한 여걸이었지만 주몽에게는 배반을,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골육상쟁을 막기 위하여 온조의 위례성으로 찾아가다가 온조의 측근들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역사의 비운을 맞는 여인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어 있다.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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