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37)안천면 백화리(5)…중리(중배실)

▲ 마을모습
안천면 백화리 백화 삼거리. 여기에서 용담댐 방향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길이 안천면 중배실과 도라실로 가는 길이다. 멀리 산 위로 고갯길이 이어지는 게 보이고, 그 중간에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마을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번 호 신문에 소개할 중배실, 중리(中梨) 마을이다.

마을을 찾아간 것은 설 밑이었던 1월29일이었다. 전날 눈이 살짝 내려 사람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엔 흰빛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붕에 약간 쌓였던 눈이 녹아 똑똑 떨어졌다. 오랜만에 날이 조금 풀리는 모양이었다.
마침 이날은 진안읍에 설 밑 대목장이 서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온 가족이 고향을 찾아올 터니, 가족을 맞을 기쁨과 설렘에 얼마나 손이 분주할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 마을약도
◆안천에서 세 번째 컸던 마을
백화리에는 예부터 배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중배실 역시 마을 뒷산에 배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배실에서 가운데 있다는 뜻이 더해져 중배실, 한자 지명으로 중리가 됐다.

이 마을은 지금도 30여 가구(50가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빈집까지 모두 포함한 모양이다.)가 살고 있는데, 수십 년 전에는 가구수가 얼마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옛날에 우리 마을은 안천에서 지사, 노채 다음으로 컸다.”라고 말하는데, 한 집에 3∼4대가 모여 살았던 예전의 가정을 고려하면 수백 명이 마을에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을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마을에서는 환갑이 넘은 정도면 젊은이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또 혼자 사는 노인이 많은데, 평균수명이 긴 여성 노인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경제적인 여건이 썩 좋지는 않다.

다만, 마을이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열려 있어 햇볕이 잘 들어 겨울에도 포근한 편이다. 그것 때문인지 전날 눈이 내렸음에도 골목 골목에 쌓였던 눈이 일찌감치 녹아 말랐다.
 

▲ 마을 앞을 흐르는 조그만 시내에 있는 빨래터. 지금은 수도가 보급돼 사용하지는 않지만, 옛 모습은 그대로다.
◆배 형국의 마을 풍수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배 형국(行舟形) 이라고 한다. 이 형국은 짐을 싣고 가는 배를 닮은 지형이라고 하는데, 그 덕에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은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나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에 마을에서는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뒷산 샘에서 물을 길었다. 마을에 가보면 마을회관 오른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빨래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이야 집집이 수도가 들어가고 세탁기가 있어 식수나 빨래 걱정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물이 부족할 때도 잦았던 모양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에 가뭄이 들면 마을 왼쪽 날망에서 불을 지피고 돼지를 잡아 피를 뿌려 제를 올렸다. 그리고 40∼50대 부녀자들이 마을 앞 개울(지금의 빨래터 자리였던 것 같다.)에서 키(챙이)를 들고 물싸움을 했다고 전한다.
 
◆마을전통 사라져 아쉬움
이 마을에서는 새마을운동 이전까지 돌탑과 선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옛날엔 마을 어귀에 숲이 있어 수구막이 구실을 했는데, 이곳에 돌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오른쪽 밭 자리가 허해 마을에서는 선돌도 세웠지만, 이 역시 새마을운동과 함께 없어졌다.

이런 마을의 상징물 말고도 산신제도 사라졌다. 마을에서는 뒷산 나무와 샘에서 산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이 역시 새마을운동과 함께 사라졌다.

물론 새마을운동을 통해 당시 매우 어지럽던 마을 경관이 크게 개선되고, 골목길과 농로포장이 이뤄지면서 주민편의가 크게 향상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령인구가 대부분인 마을에서 무슨 일을 하기는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 왜병에 몸이 더럽혀졌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의병장 황대성 장군의 아내 옥천 육씨의 정려. 화산서원 정문 앞에 있다.
◆화산서원, 옥천육씨, 효자 황민찬
중배실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가장 많은 주민이 사는 곳은 그대로 중배실로 불리고, 학교가 있는 백화 삼거리 쪽은 ‘교동’(이 마을은 중배실에 포함돼 있다가 독립 행정리로 분리됐다.), 그리고 중배실로 들어가는 어귀에 몇 집이 모여 있는 곳은 대추말이라고 부른다.

이 대추말에는 여러 사적이 모여 있는데, 도로 가에 있어 눈에 잘 띤다.
먼저 화산서원(華山書院)이다. 이곳은 조선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알려진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자손인 황보신(黃保信)·황징(黃徵) 등을 배향하고 있는 장수 황씨의 사당이자 서원이다. 서원 강당에 있는 현판 기록에는 1922년 서원으로 승격되고 1970(경술)년 2월 중수되었다고 적고 있다.

▲ 중배실에 있는 화산서원. 이곳에는 조선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알려진 방촌 황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황방촌 영정은 지방유형 문화재 129호로 지정돼 있는데, 이 영정은 1474년(세종 6년) 황희의 나이 62세 때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 영정은 경북 상주군 모동 수봉리 옥동서원(玉洞書院)에 봉안돼 있었는데, 상주의 황씨 종인이 1844년 복제하여 나누어 받아 화산서원 관리인이 보관해 오다가 1927년 화산서원이 건립되자 화산서원에 보관하였다.

화산서원 앞에는 옥천 육씨 정려(沃川陸氏旌閭)가 있다. 지지난 호에서 구례마을을 소개할 때 언급한 적이 있는 의병장 황대성 장군 처의 절개가 알려져 조정이 정려를 명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화산서원 옆 도로 건너편에는 황민찬 정려(黃玟燦旌閭)가 있다. 송재(松齋) 황민찬(黃玟燦, 1868∼1951)은 황희의 후손으로 고종 을사년에 황민찬의 효행을 높이 사 정려가 내려졌다.
 

▲ 화산서원에서 도로 건너편에 있는 황민찬 정려. 황민찬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고종때 그의 효행이 높이 평가돼 정려가 내려졌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노인들
마을회관에 있던 할머니들이 분주해졌다. 보일러를 켜고 한참이 지났는데 방이 따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져봤는데, 영 차가운 방바닥은 덥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 노인이 어떻게 손을 데더니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까지 확인하고서야 “이제 됐다.”라며 안도했다. 사건의 시작은 누군가 ‘난방’이 아닌 ‘급탕’으로 보일러 스위치를 잘못 조작했기 때문이란다. 그 뒤 방에서는 보일러 스위치에 절대 손을 대지 말라는 당부가 오갔다.

▲ 중배실과 대추말 사이 광장에 있는 마을 정자. 주위의 목조 건축물과 잘 어울린다.
이런 보일러 사태가 마무리되고 노인들로부터 옛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왜정(일제 강점기) 때 시집왔는데, 그때는 일본놈들이 얼마나 고약하게 굴었는지 몰라. 쌀만 보이면 걷어 가니까 몰래 밥을 해서 땅에 묻어 감춰야 했어. 그리고 들키지 않도록 몰래 설거지를 하고, 솥에 쑥밥을 해서 조금 넣어놔서 양식이 없는 척했지.”

“그때 마을에 밀대(앞잡이)가 있었잖아. 그렇게 일본놈들하고 다니면서 나쁜 짓 하더니 해방되고 도망갔잖아. 마을에서 그놈들 집에 가서 모두 부숴놨는데, 분이 풀려야지. 뒤에 듣기로는 도망가다가 죽었다지?”
한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을의 근대사가 시작됐다. 노인들은 시집왔던 당시의 모습을 기억에서 꺼내며, 때로는 ‘어이구, 이런’ 같은 추임새도 넣어가며 이야기꽃을 피워갔다.

▲ 마을회관에서 만난 중배실 주민들. 이곳에서 주민들은 함께 지내며 겨울을 난다.
“해방되고 5∼6년간은 살만했는데,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와 해코지를 해댔어. 인민군들이 마을에만 들어오면 쌀 달라고 난리였지. 그래서 양식은 모조리 땅에 묻어 숨겼어.”

모진 게 목숨이라 어려워도 살만은 했지만, 가족이 목숨을 잃는 사건은 가슴에 깊이 박혀 한이 되었다.
“우리 마을에 대학생이 하나 있었어. 인민군들이 대학생을 데려갔는데, 대학생이 도망가서 숨었다나봐. 그래서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여기저기 다 뒤졌는데, 하필 우리 시아버님이 담배 태우려고 방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어. 총알이 팔과 가슴을 뚫었지.”

▲ 화단을 멋지게 가꾼 한 주택. 남편이 워낙 부지런해 이런 좋은 화단이 생겼단다.
▲ 겨울이면 중배실 주민들이 모이는 마을회관. 이날 아침 주민들은 보일러 때문에 한참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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