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영 경제학박사

우리 고장 진안이 낳은 이 시대의 큰 어른 산민(山民) 한승헌(韓勝憲) 선생님께서 지난 4월 20일 운명(殞命)하셨다. 선생님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이 '시대의 양심' '진정한 스승'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수탈을 강화하던 1934년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주로 나가 고학을 하며 대학까지 마치셨다. 약관 23세에 고시 합격, 군 법무관을 거쳐 1960년 검사로 임관됐고 1965년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 시인이며 수필가, '저작권'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법학자로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셨고, 인권변호사, 출판인, 서예가 등 법조계와 문학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셨다. 국민의 정부에서 감사원장이 되셨다. 딱딱한 법을 다루면서도 문학을 함께하시며 부드러움을 추구하였고 재치와 해학으로 유머러스한 삶을 사셨다. 

선생님의 글솜씨는 고등학교 때 현상 논문 공모에 당선되며 증명되었고, 인권변호사 씨앗은 대학교 1학년 때 법원이 공모한 '인권' 논문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뿌려졌다. 문학적 소양은 학보 편집과 대학신문을 창간케 했다. 대학 시절 이병기·신석정 선생님 같은 한국문단 거목(巨木)의 가르침 속에서 문학적 소양이 성장했다. 1957년 대학 4학년 때 재수 끝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군 법무관 중위로 3년 반을 복무하고, 1960년 가을 검사로 임용되어 경남 통영지청으로 발령됐다. 1962년 법무부 검찰국 검찰과로 이동되어 법무행정을 지원하다가 1963년 검사라면 근무하고 싶은 곳, 서울지검으로 발령되어 일하셨다. 1965년 성격상 사람의 죄를 추궁하기보다 억울한 사람을 옹호하는 변호 활동이 적성에 맞을 것으로 판단돼 검사임관 5년 만에 변호사의 길로 나스셨다. 1966년 남정현 작가의 <분지(糞地)> 필화사건의 변호를 맡아 험난한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다. 1967년 '동백림간첩단사건'의 이영노 화백 부부와 천상병 시인의 변호를 맡아, 거대한 권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민초(民草)의 손을 잡아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하셨다.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의 노인영·허정길·박경호의 변호를 맡아 감형(減刑)하셨다. 1970년 <사상계>에 발표된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문제가 되어 저자는 물론 <사상계> 발행인과 편집인, <민주전선> 주간과 편집위원이 구속되는 사건에서도 변호를 맡아 군부독재와 싸우셨다.

같은 해 <다리>지 필화사건이 발생했다.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문제가 됐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물론 발행인과 주간도 함께 구속되었다. 이를 맡아 반공법 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1심에서 대법원까지 3전 전승, 내리 무죄판결을 받아내셨다.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서도 서승·서준식 형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형량을 낮추는데 만족해야 했다. 1972년에는 '국제 엠네스트(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창립을 주도하셨다. 양심수 구원, 사형 폐지, 고문 철폐, 공정한 재판, 수감자 처우 개선 등을 위해 활동하셨다.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에서 박형규 목사를 변호하셨는데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틀 후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2심은 1987년 무죄판결이 났다. 1972년 이후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위해 활발히 변호 활동을 하셨다. 1974년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유신철폐 개헌 운동'이 전개되자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여 이를 막고 나섰다. 이 위반 사건의 피고들을 변호하셨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피의자들을, 1975년 연세대 김동길·김찬국 교수의 긴급조치 4호 위반 사건도 변호하셨다. 이때, 선생님 본인께서도 1975년 3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아홉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항소심에서 풀려나셨으나 1976년 11월 23일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돼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실업자가 되셨다. 이때 그를 변호한 변호인단이 무려 129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생계를 위해 1978년 7월 출판사(삼민사)를 내어 운영하셨고 저작권법 연구와 강의도 이어가셨다. 1980년 5월 17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류, 연행돼 온갖 고문과 회유를 뿌리치고 군부 세력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군사재판에서 1심 징역 4년, 항고심에서 3년으로 감형되어 두 번째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1년여를 지내시다가 1981년 5월 11일 '부처님 오신 날' 특사로 석방되셨다. 1983년 8월 15일 변호사 자격이 복권되었다. 1985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저작권법 강의를 맡아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셨고 이어 서강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도 강의하셨다. 1985년 '민중교육 사건',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도 권력에 맞서며 당당히 변호하셨다.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에 주도하셨고,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을 맡아 1988년 5월 15일 창간호를 발간하셨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변호인석에서 볼 수 있었다. 1993년 7월에 '동학농민기념사업회' 이사장에, 1998년 3월 3일 감사원장에 취임하셨다. 공직자들이 국민의 공복이 될 수 있도록 감사 방향을 설정하셨으며 감사원장의 정년을 70세로 연장하시고 본인은 65세에 정년하셨다. 공명정대(公明正大)를 실천하신 청백리(淸白吏)이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 변호사로 활동하셨고, 2004년 외국어대학교 재단이사장을 맡아 내분을 수습하셨으며 2004년 12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법 제도 개혁에 일조(一助)하셨다. 2018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헌신, 사법개혁과 사법부의 탈권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셨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치신 분이다. 지독하리만큼 기록광(記錄狂)이셨고 집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셨다. 기록을 묶어 저서를 남기셨다. 또한 시인이셨다. 《법과 인간의 항변》(1972), 《위장시대의 증언》(1974), 《내릴 수 없는 깃발을 위하여》(1983), 《허상과 진실》(1985), 《법창에 부는 바람》(1986), 《갈망의 노래》(1990), 《그날을 기다리며》(1991), 법학 전문서적으로 《알기 쉬운 생활민법》(1987), 《저작권의 국제적 보호와 출판》(1987), 《정보화 시대의 저작권》(1992), 시집으로 《인간귀향》(1961), 《노숙》(1967) 등이 있고, 《법창으로 본 세계 명작》(2008),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2009), 《유머수첩-한승헌 변호사의 산민객담3》(2012), 《피고인이 된 변호사》(2013), 《권력과 필화》(2013),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2014),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2016), 《한승헌 수필전집》(2017) 등 4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기셨다. 

선생님의 고향 사랑과 후배 사랑은 유별나셨다. 고향 모교인 안천초중고등학교에 2만여권의 장서를 보내 후배들의 면학 분위기를 증대시켰고, 특강을 통해 후배들이 웅지(雄志)를 갖도록 이끌어주셨다. 용담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된 '실향민'임을 강조하셨다. 물에 잠기기 전에 마을 마을을 찾아다니며 기록을 남기시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고향 후배들과 1년에 두세 번씩 자리를 함께하시며 격려 말씀을 주시고 특유의 해학(諧謔)으로 분위기를 주도하셨다. 선생님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드셨지만 하늘나라에서도 고향과 후배들이 잘되도록 지켜봐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승헌 선생님은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한 몸 기꺼이 내던지시며 사랑을 주신 이 시대 큰 어른이시고 참 스승이셨다. 선생님의 부음에 큰 슬픔 가눌 길이 없으며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기원합니다. 산민 한승헌 선생님! 선배님이 계셔서 이 후배는 자랑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본 글은 선생님과 함께했던 추억을 상기하고 선생님 자서전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2009)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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