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역사의 현장(現場)
찢겨진 역사의 현장(現場)
  • 진안신문
  • 승인 2008.03.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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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숨겨진 실체(實體)의 흔적(痕迹)을 본다
역사이야기(10)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삼국유사 제2권 紀異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설화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이름도 없고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吾天干), 신귀간(神鬼干)들의 9간(干)이 있어 이들 수장(首長)들이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고 사는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18년 임인년(서기42년)3월 상사일(上巳日)에 아홉 마을 촌장들이 백성들과 함께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이곳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였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에서 흙을 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龜何龜何/首其現/若不現/燔灼而喫也)라고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로부터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하였다. 9간 들은 그 말을 따라서 백성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는데 그 끝자락을 따라가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궤짝 속에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12일이 지나고 알 여섯이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10여일이 지나니 키가 9척으로 은나라 천을(天乙,탕왕)과 같았고, 얼굴모습이 용 같은 것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고, 눈썹이 여덟가지 색채인 것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重瞳)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하니 대가야의 수로왕(首露王)을 비롯하여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등 여섯 가야국의 시작이다. 구지가(龜旨歌)는 전해지는 노래 중 가장 오래된 집단무요(集團舞謠)이며, 주술성을 지닌 노동요(勞動謠)로서 수로왕의 강림 기원을 주제로 하는 이 노래는 영신군가(迎神君歌), 구지봉영신가. 가락국가(駕洛國歌)등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몇 가지 문헌(신라 왕조실록,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삼국왕조실록 등)과 경북 문천군 지방에 박혁거세와 관련되어 전하여 내려오는 전설을 생각하면서 찢겨진 역사의 숨겨진 흔적을 추정해 보자. 혁거세 왕이 나이가 좀 들었을 때였다. 이상하게도 밤마다 왕이 나들이를 다녀왔다. "잠시 다녀오리다.”라고 말하고 왕이 나갈 땐 꼭 말방울 소리가 들렸는데 말 발굽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늦은 밤에 호위도 없이 나가는 왕이 알영왕비는 걱정이 되었다. 왕이 타는 말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이기 때문 이였다. 왕비는 도술을 잘 쓴다는 도사를 찾아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대책을 묻고 자신이 미물로 변하는 도술을 익혔다.어느 날 밤 왕이 또 스르르 일어났고 말방울 소리가 들렸다. 왕비는 도술로서 자신의 모습을 미물로 바꾸고 말에 붙었다. 말은 순식간에 천상에 다다랐다.

옥황상제는 예를 갖추는 왕을 반갑게 맞았다. 둘은 함께 울리는 풍악 속에서 음식을 들었다. 상제는 왕에게 "이제 이곳에서 함께 할 날이 멀지 않았소.”하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상제가 갑자기 낯에 노여움을 나타내며 "이보시오, 어찌하여 이곳에 인간을 데려왔오. 인간을 데려오면 안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하였다.

그러나 왕은 영문을 몰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상제가 말을 데려다가 빗질을 시켰더니 한 미물이 떨어졌고 그것은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알영왕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왕비는 상제에게 용서를 빌었고 왕은 친분을 변치 말기를 애원하였으나 상제의 노여움은 가실 줄 몰랐다. 왕비는 다시 인간세계로 보내졌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궁 앞에 왕의 몸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널려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왕의 변사에 궁중은 눈물바다 속에서 장례를 치른 뒤 왕의 시신을 한데 모아 왕릉을 만들었다. 그러데 다음날 폭발음을 내면서 왕릉이 터져 시신이 나와 널려젔다. 그런 일이 있자 신하들은 궁리 끝에 시신을 각 부분으로 나뉘어 다섯 개의 릉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그것이 오늘의 오릉이다.

신라의 정치적 변천은 지배자의 호칭변화에서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초기 신라의 지배자는 거서간, 차차웅(제사장)으로서 경주일대에 한정된 제정일치적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후 신라의 세력은 석탈해와 연합함으로서 박, 석, 김씨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 진 지배자의 명칭이 이사금이였다. 신라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국가체제로 전환되는 시기는 마립간호칭을사용하는 내물왕 때 부터였다.

박혁거세 거서간의 다음대는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어디에도 그가 적자이기는 하지만 태자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거서간 60년9월조에"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뢰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이 벼락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성에 나타난 두 마리의 용, 왕궁의 두 왕의 은유적 표현은 아닐가?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 거서간이 왕위를 물려준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두 마리의 용이 출현한 사건으로 혁거세 왕 재위 60년 신라에 있었던 내란의 흔적으로 왕과 태자가 살해되고 살아남은 남해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 아닐가? 삼국유사의 기록"왕의 시신이 다섯 동강이 났다.” 왕이 반란군에 의해 시해 당해 그 몸이 다섯 동강 난 것은 아닐가? 왕과 왕비의 합장을 큰 뱀이 방해 한 것, 이것도 반란세력의 방해를 뜻하는 것은 아닌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앞의 전설들을 종합해서 추정하면 이렇다. 즉 태자가 죽임을 당하고 왕은 궁 안에 유폐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면 몰래 밖으로 나가 하늘(북쪽)에 있는 낙랑국에 왕비와 자신의 안전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것이 감시하는 반란세력에게 탄로되고 잡혀와 죽임을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왕비도 죽었을 것이다. 전설에 전하는 옥황상제는 실제로 낙랑왕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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