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 그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본다
역사이야기(11)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조선중종 때 찬수관을 지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대진국(大震國) 본기(本紀) 제7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朝代記曰開化二十七年九月二十一日平壤城陷落時振國將軍大仲象守西鴨綠河聞變遂率衆走險路經開原聞風願從者八千人乃同歸而東至東牟山而據堅壁自保稱國後高句麗建元重光傳檄所到遠近諸城歸附者衆惟以復舊土爲己任重光三十二年五月崩廟號曰世祖諡號曰振國烈皇帝太子祚榮從訃使自營州薊城率衆至卽帝位…」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 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전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다. 태자 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대진국의 시조의 고구려와의 혈족관계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한민족의 건국사를 고찰해 볼 때 건국과정에는 언제나 건국의 두 주체가 있어 두 사람이 일심협력 하였을 때 역사가 항상 강건하였음을 볼 수가 있다. 이 두 사람은 부자관계 일수도 있고, 사제관계일 수도 있었고 장인 사위의 관계일 수도 있었고 또는 모자관계 일수도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대진국의 건국은 두 부자의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 진 장쾌한 역사의 흔적이 아니였겠나 하는 생각이 된다. 대중상의 묘호는 세조라 하되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함으로서 대진국의 상징적인 시조임을 표현하였고, 대조영의 묘호를 태조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天統二十一年春崩干大安殿廟號曰太祖諡號曰聖武高皇帝)라 함으로서 대조영을 대진국의 실제적인 시조임을 표현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된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였다는 《구당서》의 발해말갈전의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였다는 《신당서》발해전의 기록이 병존하고 있으며 이 기록들 모두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조에서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만 여겼을 뿐 아예 한국사에 포함 시키지도 않았다.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정 2만8천여가구를 요하 서쪽 영주지방으로 강제 이주 시켰는데 대조영의 일가도 거기 속해 있었다. 696년 이진충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 자립을 꾀한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 대조영을 추격하자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당군을 격파,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국가 건설의 기반을 굳힌다. 699년에 동모산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유화정책을 보였으며, 중종 (中宗)은 705년 진국에 사신을 보내왔고 대조영도 그의 아들 대무예(武王)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답하기도 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은 대조영에게 좌호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였고 이때부터 진국은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시원한 기록이 없다. 대조영이 죽은 뒤, 무왕, 문왕,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 등을 거쳐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목저주(木底州), 현토주를 설치하고, 요동진출을 본격화 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 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선왕이 재위10년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는 어디에도 뚜렷한 기록으로 찾아 볼 수가 없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률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어, 당시 귀족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여 외부세력의 침범에 방어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발해를 공격하여 서기926년 1월 15일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동모산에 나라를 세운지 15대 258년(668―926)만에 그 역사의 끝을 보았다.

거란은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그 곳을 다스렸다.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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