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42 부귀면 세동리(3) … 신덕(덕봉·신기)

▲ 마을약도
지도를 보니 부귀면 세동리에 '곰티재'라는 지명이 두 곳이다.
하나는 세동리 부암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리 신촌리로 넘어가면서 바로 나오는 곳으로, 완주군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웅치전적비'라는 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비석에 이르는 길 초입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라고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다른 한 곳은 신덕마을에 있다. 문화원에서 발간한 '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에는 '곰티재2'라고 기록해 두었다. 부암마을 쪽 곰티재 길은 드물게 자동차가 다니는 흔적이 있지만, 신덕마을 곰티재 길은 마을에서 이용할 목적으로 새로 낸 길이다. 기존에 있던 길은 이용하지 않아 수풀이 우거졌다. 그리고 이 길은 정상에서 끊긴 지 오래다.

지명과 웅치전적비만 봐서는 부암마을 쪽 곰티재가 '원조' 같다. 하지만, 진짜 곰티재는 많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신덕마을 쪽이 진짜 원조였다.

◆신덕마을에 들어서다
지난달에 이어 다시 부귀면 세동리를 찾았다. 세동리에서 모래재 터널을 잇는 도로를 따라 터골 앞에 도착하면 왼쪽으로 눈길을 끄는 몇 가지 조형물이 보인다. 신덕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와 마을간판, 그리고 지덕재(智德齋)라는 재각을 알리는 비석이다.

현재 마을 입구에는 대덕선도로 확포장 공사가 진행중인데, 중간 중간 일부만 아스콘 포장이 된 상태인데, 도로공사가 진행되면서 지덕재 비석이 도로 바깥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신기(새터)'라는 지명의 자연마을이 나온다. 마을 초입에는 '지덕재'라는 이름의 재각이 하나 나오는데 밀양 손씨 종중에서 조상을 모시는 곳이다. 그리고 신기에서 한 10여 분을 올라가면 덕봉마을이 나오고, 그 뒤로도 포장된 산길이 이어진다.
 

▲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된 후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은 야생화 체험장.
◆농촌전통테마마을 조성 한창
신덕마을은 덕봉마을과 신기(새터)마을을 합한 행정리로 스물여섯 세대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덕봉마을은 1800년경 밀양 손씨가 들어오면서 이뤄진 마을인데, 점차 마을이 확대하면서 신기마을도 생겼다. 지금도 신덕마을 인구 구성을 보면 밀양 손씨가 70%를 차지하는데, 전형적인 집성촌 모습을 띠고 있다.

신덕마을은 예전 표고버섯의 주산지로 유명했다. 우리 고장에서 첫 표고버섯 재배가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는 소득수준이 꽤 높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 노령화로 농사를 접는 사람이 늘어 경제적인 여건이 썩 좋지 못하다.

다만, 지난해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돼 이를 마을 발전의 전환기로 삼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마을에서는 약초와 야생화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각종 체험단지를 조성하는 한편, 관광객들이 머물고 쉴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방문자센터 등을 만들어 농촌전통테마마을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춘다는 계획이다.
 

▲ 밀양 손씨 제실. 밀양 손씨는 이 마을에 정착해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전주로 가는 길목
신덕마을은 근대화 이전까지 교통의 요지였다.
신덕마을에서 뒷산 곰티재로 이어지는 길은 완주와 전주로 이어지는 중요 교통로였는데, 무진장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가장 큰길이었다. 고개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고, 문화원에서 세운 웅치싸움 안내판이 서 있다.

현재도 지적도를 살펴보면 넉 자 넓이의 도로가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는 게 주민의 설명이었다. 특히, 덕봉에는 요광원(要光院) 이란 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원터에서는 청기와 등의 유구가 수습되기도 했다. 신덕리가 여러모로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증거들이다.

이런 신덕리 마을 길이 제구실을 잃은 것은 새 도로가 생기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에 부암마을에서 완주군으로 넘어가는 길(현재 웅치전적비가 있는 곰티재)이 생기고, 모래재 터널까지 뚫리면서 사람들이 더는 신덕마을을 통해 전주로 가지 않았다.
지금은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등산객 정도만 이용하는 그런 곳이 됐다.
 

▲ 전혀 엉뚱한 곳에 세운 웅치전적비
◆목숨으로 왜적과 맞서다
임진왜란 당시 신덕리 일대 골짜기는 조선과 왜군의 육군 격전지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웅치싸움은 전라도 공략을 책임지고 있던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지휘하는 1만여 명의 군사가 진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왜군은 금산과 무주, 진안을 점령하고 웅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이에 맞서 조선 육군과 의병은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인 웅치에서 왜군을 맞았다.

당시 조선군은 의병장 황박을 1진에, 나주판관 이복남을 2진,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이 3진으로 웅치에 진을 쳤다. 기록에서는 당시 우리 고장에 살던 김수·김정 형제가 참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7일 첫 전투가 시작됐다. 왜군은 선봉에 수천의 병력을 앞세워 웅치로 진격했다. 이에 의병장 황박과 나주판관 이복남이 죽기로 싸워 적의 선봉을 꺾어 왜군은 잠시 물러서야 했다.

왜군은 다음날 해가 뜨자 다시 밀고 들어왔다. 왜군은 전날의 패배를 씻으려는 듯 모든 병력과 화력을 집중했고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백병전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그렇게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저녁 무렵 병력이 적었던 조선군은 힘이 달리고 화살까지 떨어져 전력에서 열세를 보이게 된다. 그 틈을 타고 왜군은 다시 전면공격을 가해 마침내 3진까지 무너지면서 조선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 등은 안덕원으로 퇴각하고, 남아서 사투를 벌이던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장정들은 전사한다.

전투가 끝난 뒤 왜군 장수는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드는 한편,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표목(標木)을 세워 조선군의 충의를 기리기도 한다.

병력의 상당부분을 손실한 왜군은 웅치를 넘어 7월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전주부성까지 진격하지 못하고 안덕원 너머에서 조선군과 대치하는데, 이미 웅치에서 주력부대에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남원에서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가던 황진이 전주에 도착해 안덕원 너머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을 격파한다.

웅치싸움은 패했지만, 전체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 한도만이라도 보전되게 된 것이 이 싸움으로 인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곰티재
◆웅치전적지, 제대로 알려야
역사적 고증과 학술적 연구결과에서 말해주듯 웅치싸움이 벌어졌던 곳은 현재 웅치전적비가 서 있는 완주군이 아닌 이곳 신덕마을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웅치싸움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뒤늦게나마 신덕마을 주민들과 군이 웅치싸움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지난해 우리 고장에서는 웅치싸움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선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웅치전몰충혼의백위령제'가 열렸다. 웅치대전 순국영령 추모제전위원회(위원장 손석기)가 주관해 지역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은 웅치싸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이 위령제를 시작으로 추모제전위원회는 올해 법인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다 적극적으로 웅치싸움이 벌어진 신덕리 일대를 성역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신덕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추모제전위원회 손종엽 사무국장은 "신덕마을 일대 지명과 역사 기록, 학술연구를 통해 웅치싸움이 우리 마을 일대에서 벌어진 것이 확실하지만, 우리 고장에서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완주군에 빼앗긴 결과를 가져왔다."라며 "기념물로 지정된 완주군 전적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마을을 웅치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림으로써 군민의 자긍심을 북돋우고 역사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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