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마지막)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동북공정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서 중국의 최고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등 동북삼성(東北三省)의 성(省)위원회가 연합주축이 되어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과거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겠다는 연구공정이다.

즉 중국의 전략지역인고조선, 고구려, 발해등 한반도와 관련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 일어 날 가능성이 있는 영토분쟁 등의 모든 문제점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주요 연구과제는 동북지방사, 동북민족사,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 정세 및 변화와 그에 따른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관한 영향의 연구 등이다.

그들은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 한반도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왜곡할 수 없는 한국사의 실체이며 만주와 한반도를 영토로 삼았던 우리 조상의 흔적들이다.

그들은 고구려 민족을 동이족이 아닌 고이족의 후손으로 규정하고 한민족과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그렇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억지를 부린다. 또 고조선과 발해의 주 민족도 고이족으로 규정함으로서 만주 및 연해주에는 조선인들의 영향력이 전혀 없었음을 주장한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종래 한국사의 체계가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 기자, 삼한, 삼국의 체계를 거부하고, 대단군조선, 3조선, 부여, 고구려중심의 역사인식 체계를 수립하고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상고시대 한국사의 역사무대를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 그리고 중국의 동북쪽지역과 랴오시(遼西)지역, 중동부지역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는 산동(山東)지역을 경영하였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 때문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 일부에 국한 되었다.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하고 있었던 식민주의 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는 삼국이전이고 그 활동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랴오시, 발해만 유역, 직예성, 산둥, 산시, 화이어(准河), 양쯔강 유역까지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900년 설을 주장한다. 앞부분 200년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한 무제와 대결했었던 세력도 부여가 아닌 고구려세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 산둥지방과 일본전역을 식민지로 삼았었던 우리 상고사에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 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는 부정적 견해를 남긴다.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실한 것이 우리 민족의 부정적 의미였다고 비판한다.

신채호는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다. 그러한 단재사관으로 고구려는 우리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고 투쟁에서 승리한 이상적 국가로 꼽는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에 부딪치면서 우리는 고구려의 정신과 그 기상을 간직하는 것이 거기 대항하여 이기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朝鮮)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르며 그 건국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본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였다. 이 무렵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북쪽에 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지배하였다는 야마토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을 말하는데 이는 일본의 우익 사학자들이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 하는 버팀대로서 이용한 학설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 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발표된 주장과 학설중에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가야(伽倻)의 왜설(倭說), 분국설(分國說),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등릐 주장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문헌이나 기타 자료를 통하여 확실하게 결론지어 설명할 수 없으며 다양한 학설만 존재 할 뿐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으니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4읍(邑)을 점령하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약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며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즉 1888년 일본국 참모본부에서비밀리에 해독한 광개토대왕비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비문의 신묘년(391)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임나, 신라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濟□□□羅以爲臣民: □는 훼손된 문자)」로 해석하여 발표하자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主語)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일본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파문이 일자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래도해파)'는 '不貢因破(불공인파)'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게 하여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미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 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왜구, 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 른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 즉 임나일본부설은 그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되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의 정립(鼎立)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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