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 계남정미소 '진안골 졸업사진첩'

▲ 옛 정미소의 모습을 놓치기가 안타까워 '공동체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난 계남 정미소.
춥고 배고팠던 시절, '쌀'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무게는 '밥' 이상이었다. 주민들에게 쌀은 곧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이유였고, 평생 짊어져야 할 삶의 역경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참 흔하게 되어버린 쌀, 늘 짊어지고 살아왔던 쌀에 대한 압박감은 벗어버린 지 오래다. 지역 곳곳에서 돌아가던 정미소의 굉음들이 멈추고 있다. 기계소리는 멈추었을망정, 정미소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김지연 사진작가는 기계소리 멈춘 계남정미소에 옛 아픔들을, 옛 사람들을,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펼쳐 놓았다.

정미소 한편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멈추어버린 정미기계와 벽 곳곳, 은은한 조명 아래 낡은 우리네 흑백사진이 제법 잘 어울린다.
 
낡은 사진 한 장, 그리고 그리움

이미 젊은 세대에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은 포토샵을 이용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에 흑백사진 한 장은 소중한 상징이었다. 한 컷, 한 컷에 집중했고 인화된 사진은 앨범 속 적당한 곳에 가지런히 정리돼 평생을 두고두고 보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계남정미소에 걸려있는 흑백사진 속에는 유명한 연예인도, 이름 높은 명승지도 없다. 그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떨리던 결혼식이 담겨 있고, 학창시절 마이산에서 뿜었던 젊음이 있으며, 그 당시 국민학교졸업식을 하던 아쉬움이 담겨 있다.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만큼 포커스, 노출, 프레임이 질적으로 높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정겨움과 재미, 감동이 있다.
흑백사진 속 그들은 똑같은 색깔의 옷에 똑같은 모양의 자세, 똑같은 표정으로 시대적 억압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왠지 그들의 모습이 다양해 보인다.

계남정미소를 찾는 지역 주민들은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이곳에 오면 이미 쭈글쭈글 주름으로 얼룩진 친구들이 17살 꽃피우던 빛나는 젊음을 간직한 채 "나도 빛날 때가 있었노라."라고 말하듯 은은한 조명 아래 전시돼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이도 사진 속에서는 이제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철없는 꼬마로 남아있다.
주민들은 졸업사진을 찍던 때를, 졸업장을 받으며 설렘과 동시에 아쉽던 때를, 영원히 선생님들의 지도 속에 살아가야 하는 줄 알았던 때를 떠올린다.
계남 정미소는 그렇게 주민들의 의식 속에 '낡은 흑백사진'이라는 매체로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 지금 계남 정미소는 졸업사진전이 전시중이다. 빛바랜 사진속에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졸업식, 그날을 다시 보기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에서는 4월부터 '진안골 졸업사진첩'이 전시 중이다.
용담댐으로 인해 수몰돼 없어진 폐교의 졸업사진은 수몰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모든 학교와 주민의 협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령면에서 열리는 전시회인데도 마령초등학교 졸업사진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이다.

마령초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기 부지기수다. 소문을 타 졸업사진을 보는 이들이 늘자 뒤늦게 사진을 제공하겠다는 학교와 주민도 속속 출현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시를 하지 못한 초등학교들도 있다. 간혹 들리는 관람객들이 자신이 졸업한 학교가 전시되어 있지 않을 때 느끼는 허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사진 구하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주로 컬러가 없는 사진들을 구하는데 소지하고 있는 주민들 찾기부터가 어렵죠."

김지연 작가는 추억이 되어버려 자칫 흉물로 전락할 뻔한 계남정미소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엮어 가는 '공동체 박물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계남정미소는 주민들에게는 낡은 추억을 되새기는 필수적인 장소가 되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자칫 잊힐 뻔한 옛 추억을 되새기며 사진 셔터가 눌리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다.
'진안골 졸업사진첩' 전시회는 오는 9월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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