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43 부귀면 세동리 … ④원세동(가늘목·잠동)

▲ 부귀면 세동리 원세동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모습. 버스정류장과 보건진료소, 그리고 골목이 나란히 있다. 한때 상당히 컸던 마을답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주택이 많다. 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았을 옛날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부귀면 세동리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곳에 가늘목과 잠동 두 자연마을로 이뤄진 원세동 마을이 있다.

두 마을엔 백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경작할 수 있는 평지가 적었지만, 주변 산비탈을 일궈가며 나름 부족하지 않게 생활했다. 그리고 이곳은 길목이었다. 곰티와 누에기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상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이랬던 가늘목과 잠동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새마을운동 때문이었다. 화전민을 없앤다며 산에서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면서부터다. 그것은 먹고살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서른 가구 정도만 남았다.

그래도 주민들은 희망을 일궈가고 있다. 조금씩 귀농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약초 재배를 확대해 수익창출도 기대하고 있다. 해발 4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의 특성과 환경, 그리고 교통·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살려 이 마을은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 메타쉐쿼이아 숲이 시작되는 곳. 마을에서는 이곳 주변에 약초를 심어 경관을 조성하는 것을 고민중이다.
◆장군대좌혈 '잠동'
본래 잠동은 스무 가구가 모여 있고, 마을이장이 있던 자연마을이었다. 그리고 마을 뒤로 이어진 길은 부귀면소재지로 넘어가는 누에기재가 있어 교통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랬던 이곳은 주민들이 떠나면서 가늘목과 합쳐졌고, 지금은 원세동마을의 일부가 됐다.

현재 이 마을 뒤로는 '공동체 이랑둥지'라는 기독교 수련시설이 있는데, 마을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마을 앞쪽은 귀농인과 원주민 몇 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이 '잠동(蠶洞)'이라고 불린 것은 마을 형세가 '누에'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 뒤로 있는 '누에기재' 역시 이런 마을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 마을은 '장군대좌'의 풍수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을 주변의 산 이름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마을 뒤에 우뚝 솟은 장군봉, 마을 앞에 길게 늘어선 나지막한 '장검날'과 '깃봉날', 그리고 마을 왼쪽 멀리 있는 '영마봉'과 오른쪽 '북중날'. 잠동을 중심으로 장군과 관련한 지명이 이런 풍수적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장군이 말에서 내려 병장기를 벗어놓고 잠시 쉬고 있는 형세가 바로 잠동마을의 주변 지형이다.
이런 풍수지리 때문에 장군봉에 묘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곳에 묘를 쓰면 후대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 원세동 보건진료소 뒤에 있는 원세동 마을회관. 꽤 오랫전에 지었는지 많이 낡았다. 그래도 마을 노인에게는 보물이다.
◆사람 많던 '가늘목'
'원세동(元細洞)'이란 마을 이름은 가늘고 길게 뻗은 골짜기를 뜻하는 '가늘목'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세동리의 본래 마을이라고 해 '원'이란 글자가 붙었는데, 세동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중심마을이다.

지금도 마을에 가보면 이곳이 중심마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동보건진료소와 교회, 그리고 많은 주택이 그것이다.

일단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골목길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주택이 밀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 뒤로 폐쇄된 교회건물도 볼 수 있는데, 1902년 건립한 세동교회의 본래 건물이다.

지금은 건물이 낡아 마을 가운데로 이사한 지 꽤 됐지만, 옛 세동교회 건물은 마을의 근현대사를 모두 담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마을은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지금 세동보건진료소가 있는 자리에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1932년 큰 홍수가 나면서 모두 꺾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는데, 나무가 사라지면서 지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장군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집집이 수도가 보급되면서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곽효직(72)씨는 원세동마을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 '생계'라고 말했다.
곽씨는 "원세동을 비롯한 세동리 일대가 해발고도가 높아 대체로 춥다."라면서 "추위와 척박한 토양 때문에 마땅한 작목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또 곽씨는 "어쩌면 세동리 일원이 진안군에서 가장 매마른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에서 세동리 활성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 한상근 옹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많은 활약을 펼쳤다.
◆원세동에서 만난 참전용사
원세동에 살고 있는 한상근(86)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정규군이 아니고, 주민 신분으로 경찰과 힘을 합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나이가 많아 잊는 것이 많다면서도 전쟁 당시 기억만은 생생했던 한씨였다.

"인민군이 퇴각하기 시작할 때였는데, 장수에서 연락이 왔어요. 인민군 몇이 곰티재를 거쳐 금산으로 갈 것이라고요. 그때 우리 마을에 이종근 상사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우정리 정자나무 근처를 지나던 인민군을 유인했죠. 그리고 저하고 같이 그 인민군을 생포해 미군에 넘겼죠. 그때 그 인민군은 소대장급이었어요."

이런 일도 있었다. 손완기 순경과 함께 말을 타고 가던 인민군을 잡은 적도 있다. 말은 경찰로 보내고 인민군은 전쟁포로로 넘겼다.

"장승파출소에 있던 이강우 순경은 아주 용감했어요.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적이 있으면 가장 앞에서 싸웠어요."
당시 함께 싸웠던 전우 가운데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마을에 손종환(80)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단다.

◆"모래재까지 약초를"
원세동마을은 최영용(61) 이장을 중심으로 새 소득작목 개발에 나서고 있다. 최영용 이장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재배한 '약초'가 그것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최 이장을 비롯해 주민 11명이 약초를 재배하고 있는데, 약초 재배 희망자가 계속 늘고 있어 부귀면 약초의 핵심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세동리로 들어오는 검문소부터 모래재까지 전부 약초를 심고 싶어요. 사시사철 약초 향이 풍기는 그런 마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진안고원생약부귀약초작목반 반장이기도 한 최 이장의 바람이다. 작목반 구성과 약초재배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최 이장은 요즘 약초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아침부터 약초재배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오고, 작목반에서 사용할 종자를 구입하려고 전국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최 이장은 자신의 밭에 약초 종자를 뿌리는 게 늦어졌단다.

"여기가 해발 430미터가 넘는 고원이기 때문에 기온이 낮고, 땅은 척박합니다. 일반적인 작목으로는 승산이 없죠. 하지만, 약초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농약을 쓰지 않고 친환경 농법으로 약초를 재배할 수 있거든요." 최 이장은 세동리부터 모래재까지 도로가 밭에 약초가 가득한 경관을 꿈꾸고 있었다.

모래재를 넘어 우리고장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운전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에서 약초 향이 물씬 풍긴다면 우리고장 약초를 널리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 군이 세동리 도로 가에 메타세쿼이아를 가로수로 심어 사이클 특화 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이것이 약초 재배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뿌리가 밭 중간까지 뻗치고, 그늘도 지기 때문에 밭 절반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안 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군의 정책에 반대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도로 가는 경관을 위한 재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 원세동 마을 최영용 이장은 부귀면 일대 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이 약초의 중심지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 1902년 건립한 원세동교회 모습.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모습이 보기 좋다.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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