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제 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성 흥 수 씨안천면 백화리 하리 출신(주)신동아관광 대표강동라이온스354D지구 의전의원/회장역임강동구 명일동주민자치위원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성흥수씨는 가끔씩 서울역 지하철의 음습한 분위기의 그것이 그리워서가 아니래도 가끔씩 그곳에 들린다. 거기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노숙자들을 보고 있도라면 문득 40여년전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본 것처럼 아련한 추억의 영상으로 다가서는 것은 참으로 그에겐 그리움에 앞서 아픈 추억으로 온다.그것은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연민이고 가난과 못다배운 한맺힌 절규의 모습 그것이었다.성흥수씨. 1948년 2월 10일생. 창년 성씨 독곡파 24세손. 금년 56세의 이제는 그래도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자타가 그렇게 생각하는 어엿한 중견 기업인이 되었다.안천면 백화리가 그의 고향이다.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그가 반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언어중 가장 처절한 그런 표현의 절규섞인 언어였을 것이다.고향 하리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상급학교 진학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교복입은 친구들을 부럽게 지켜보는 세월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때만 하여도 그는 어떻게든지 배워야한다는 일념만이 살아가는 의미의 전부였다.청운의 꿈. 1964년 1월, 그는 드디어 그것의 달성을 위하여 고향을 떠난다. 인근 도시인 전주에 무작정 도착한 성흥수씨는 전동의 잡화도매상 삼광상회에 점원으로 취업한다. 밥 먹고 잠이나 재워주어도 고마워하던 그시절 그는 일하면서 배워야 하겠다는 집념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영생학교 야간부에 입학한다.그러나 쉽지만은 않은 사회였다. 이루어질 수 있는 청운의 꿈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넓고 더 높은 미래가 어디엔가 있을것만 같은 생각에 쫓겨서 성흥수씨가 전주에서 야간중학교 2년을 채 못 마치고 서울을 향해 도약의 길을 떠난것이 1966년 겨울, 그의 다져먹은 마음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추위가 맴돌던 서울역의 대합실. 그날 이후 그의 노숙의 생활을 성흥수씨는 잊을 수가 없다.그의 나이 열아홉적 일이었다.넝마주이와 구두닦이 시절. 서울역 대합실과 남산을 전전하며 노숙하던 60년대의 그 시절. 식당과 다방을 전전하며 틈틈히 꺼내보던 낡은 중학교 교과서 뭉치들.반세기의 시공을 건너서 오늘 잃어버린 표정의 저 노숙자들, 삶에 대한 의욕이 이미 없는 그곳. 잃어버린 인생에 대한 욕구가 회복될 수 조차 없을 것만 같은 한없이 불확실한 포기와 절망과 좌절이 적막처럼 흐르는 저들 노숙자들을 보면서 오늘의 성흥수씨는 무던히도 속상해하면서 심한 고뇌속에 빠지곤 한단다.성흥수씨의 이렇게 암울했던 20대가 1969년 그의 군 입대로 인하여 일단은 마감이 되었지만 그가 얻은 교훈은 큰 것이었다.“불확실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도 뚫려진 통로는 있는 법. 그것을 찾아나서는 것이 젊음의 권리이고 의무인것 이다.”군 생활을 거의 월남의 ‘니노아’지역에서 보냈고 삶과 죽음의 전장을 오가면서 또 다른 인생의 노하우를 배우고 귀국한다.1973년 군을 제대한 그는 이제 제법 자신있게 서울에 입성한다.갖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자전거 한대를 장만하고 계란장수로 시작한다. 철따라 얼음장수로 재미를 익힌다.당시 관철동 어깨들의 이권다툼속에서 때로는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였다. 겨울에는 석유장수로 꿋꿋하게 어려운 시절을 맞서 나가기도 하였다.그는 어렵고 외로운 객지의 여정에는 혼자보다는 둘이 낳겠다는 진리도 터득하고 지금의 강영임 여사와 결혼하여 1남1녀의 아버지가 된다.성흥수씨는 말한다.“가정은 튼튼한 생활인의 버팀목인 것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후 깨달은 인생의 철학입니다.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던들 오늘의 내가 가능했는가하고 항상 생각합니다”그즈음 성흥수씨는 쌓아온 자신의 의지에 인생의 경륜을 대입하고자 노력한다. 지금의 그는 오직 가난과 배우지 못한 한을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자락처럼 숨겨 간직하고 있었음이다.1980년에는 신창종합설비로, 그리고 한샘부엌가구 대리점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틈틈, 1986년부터는 신설동의 고려학원에서 수학하여 중·고등·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88년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하므로서 그의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처럼 숨겨두었던 면학에 대한 실마리도 조금씩 풀어나갔다.1993년에는 샘터 청소년수련원. 1999년에는 도고유스호스텔 수련원 원장으로 그리고 2003년에는 지금의 신동아관광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자신의 한으로 남겨있는 배움의 길에 있는 후진들을 위하여 장학회의 설립도 생각하고 있으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범이 성흥수씨는 되고 싶어 한다.이제 우리의 고향 진안사람 성흥수씨.가난을 이겨내고 못배움의 한 속에 반편생을 도전하여 온 그가 서울역 대합실의 그 잃어버린 향수의 탈피를 위하여 불확실성의 회복을 위하여 절망과 좌절의 회복을 위하여 노숙자들에게 가슴아파 다가가는 마음으로, 진안 그곳으로 다가가는 성흥수씨의 앞날이 있음을 우리함께 기다리고자 한다.(H.P : 011-216-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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