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46 진안읍 반월리 … (1)산수동(지소)

▲ 마을앞 숲은 마을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도로를 기준으로 왼쪽이 예전 당산나무의 자손나무이고, 오른쪽은 마을 주민들이 쉴 수 있는 쉼터로 조성됐다.
익산-장수간 고속도로 진안요금소를 지나 바로 왼쪽 진입로가 반월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대형 레미콘 공장이 있어 찾기가 쉽다.

'반월리(半月里)'는 원반월, 금마(지매실), 산암(산수동, 고암리), 외기 네 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진안군 두미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기리, 송내리, 지소리, 고암리, 금마곡 등을 병합해 지금의 반월리가 됐다.

특히 '반월'이라는 지명은 풍수지리상 '운중반월(雲中半月)', 즉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반달' 형국의 명당자리라고 일컫는 원반월에서 유래했다.
반월리 네 개 마을 가운데 처음 찾은 곳은 산암이었다. 반월리에서도 맨 끝에 있는 행정리다.

▲ 쌀을 도정하고 있는 박봉열(60)씨
◆마을 앞 지키는 숲
산암(山岩)은 산수동(지소)과 고암 두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행정리로, 두 자연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산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두 마을 가운데에서도 진입로 끝에 매달린듯한 마을이 산수동(山水洞)이다. 커다란 골짜기 두 곳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 마을 위치다.

일단,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마을 숲이다. 굵고 높은 나무 여러 그루가 울타리처럼 마을 앞을 가리고 있는데, 나쁜 기운이 이 숲에서 걸려 마을까지 이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 밑으로는 개울 하나가 흐르고, 그 위로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개울 건너 있는 농경지를 오가기 위해 만들어놓은 다리인데, 그 덕에 개울 건너편 숲 아래는 시원한 그늘이 있는 유원지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차분하게 놓인 정자는 한여름 무더위에도 땀을 식혀줄 만큼 시원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긴의자와 운동기구도 몇 개 놓아두었다. 여름에 따로 시간 내서 멀리 피서갈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한 피서지였다.
 

▲ 4년 전쯤 지은 마을 뒤 저수지와 정수장
◆사라진 돌탑과 당산나무
마을 숲에 있었던 것들이 지금은 사라졌다.

먼저, 당산나무다. 당산제를 지냈던 마을 수호나무였다. 지금 마을 숲 왼쪽 언덕에 있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은 넓지 않은 평지만 남아있다. 당산나무가 사라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지내오던 당산제도 끊겼다. 그때까지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밤에 당산나무 아래 모여 굿을 하고, 소지를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탄 당산나무 자손이 무럭무럭 자라 마을 숲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사라진 것이 돌탑이다. 주민들 얘기에 따르면 엄청나게 컸다.

문제는 새마을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도로를 내야 했고, 도로 자리에 돌탑이 있었던 것이다. 돌탑을 옮겨서 세울 수도 있었지만, 당장 도로를 내는 게 급했던 모양이다. 돌탑을 허물어 도로를 내는데 사용했다.

마을 아낙들은 머리에 돌을 지어 나르고, 남자들은 삽과 곡괭이로 도로를 닦았다. 당시 산수동은 마을 바깥과 이어지는 길 대부분이 좁아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고 하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 종이공장이 있었던 곳. 지금은 담배밭이 됐다.
◆산수동 또는 지소
산수동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지소(紙所)'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였던 것으로 사람들은 기억했다. 당시 마을에 대규모 종이 공장이 들어섰다. 닥나무를 삶고 껍질을 벗기고, 양잿물에 섞었다고 한다. 전통 한지를 생산했던 공장이다.

이 공장이 있던 곳은 산수동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펼쳐진 담배밭이다. 당시에 종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인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꽤 잘나갔던 공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주민 석장원(68)씨로부터 당시 공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이 물이 좋아서 한지를 만들기 좋았데요. 일제 강점기에 외국인 근로자를 사용해야 했을 정도니 꽤 일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석장원씨는 당시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종이 한 묶음이 1천 장이었는데, 공장 근로자들이 종이를 지게에 담아 지고는 전주까지 걸어가 팔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종이공장 덕에 다른 마을에서는 산수동을 '지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좋은 산과 맑은 물'로 대표되는 마을이 '종이 공장이 있는 곳'이란 뜻의 지소가 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산수동과 주변마을이 종종 다퉜다고 한다.

종이공장이 문을 닫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쯤이라고 한다. 산수동에 종이 공장이 들어서고 한참이 지나서 아래 고암마을에도 종이공장이 하나 더 들어섰는데, 결국엔 한지 수요가 적어지면서 문을 닫아야 했던 모양이다.
 

▲ 자세히 마을이야기를 들려준 석장원(68)씨.
◆가족 같은 이웃사촌
사실 산수동은 그리 잘사는 동네가 아니었단다. 사람이 많이 살았던 시절에도 마을에는 스무 가구 정도가 살았다니 그리 큰 마을이 아니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교통도 좋지 않았던 외딴 산촌마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몇 가구만 남아 마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덟 가구 정도라고 하는데, 그도 대부분 노인이다.

마을이 위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후한 인심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낯선 사람이라도 마을에 들어오면 손님이고, 작은 것이라도 하나 대접해야 하는 게 이 마을에서는 당연하다.

또 마을에서 누군가 애경사를 맞으면 마을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서로 돌봤다. 지금도 마을에서 누가 생일이면 그날은 온 마을 사람이 모이는 날이다.
 
◆산너머 죽산리 어은
마을에서 합쳐진 두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고갯길에서 만난다고 한다. 고갯길은 진안읍 죽산리 어은으로 이어지는데, 도로를 닦기 전에는 걸어서 많이들 넘어다녔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다.

마을에서 왼쪽 골짜기는 모시골, 오른쪽 골짜기는 큰삼배실골, 작은배실골로 불린다. 이 가운데 오른쪽 골짜기에는 4년 전쯤에 대형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뒀다. 그리고 그 아래 정수장도 두었다.

사실 지금 저수지 자리는 상당히 넓은 농경지가 있었다고 한다. 한 주민은 지금 마을 주변 농경지보다 저수지 자리 농경지가 훨씬 넓었다고 얘기해줬다. 그러면서도 이 주민은 "어차피 사람도 없고, 있는 사람도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농경지가 저수지로 편입된 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 있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 마을약도
◆마을회관은 아랫마을에
산수동이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지만, 거주하는 주민이 적어 아래 고암마을과 한 마을로 묶여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고암에 마을회관을 세웠다.

물론 고암과 산수동이 그리 멀지 않지만, 문제는 산수동 거주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라는 점이다. 날이 조금만 궂어도 노인들이 마을회관까지 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회관이 없어도 주민들은 크게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주민 사이에 정이 돈독해 모이는 곳이 곧 마을회관이다.

오다가다 만나면 술 한 잔 기울이고,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곳 산수동. 마을 이름처럼 사람들은 푸르고 깨끗한 주변 환경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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