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봉이 거울 보면 마을 발전
우리 마을 이야기 50 진안읍 반월리 … ⑤외기

▲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외기마을 모습
장마가 시작되고 첫 비가 내린 다음날. 장마전선이 잠깐 남쪽으로 내려가 비가 그쳤지만, 하늘엔 여전히 두꺼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란 우산을 옆에 끼고 취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이번에 둘러볼 마을은 진안읍 반월리 여섯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인 '외기'다.

원반월에서 솔안마을을 끼고 나지막한 산허리를 돌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길은 가림리에서 다시 만나는데, 왼쪽으로 난 길이 외기로 향하는 길이다.

솔안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나지막한 산 아래로 난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무 몇 그루가 모여있고, 그 아래 정자가 보인다. 외기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정자가 있는 곳은 수구막이 구실을 하는 마을 숲이다. 서나무와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옛날부터 가꿔온 숲인데, 최근에는 마을에서 땅을 조금 더 사들여 보기 좋은 나무 하나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 나무는 옮겨 심다가 뿌리를 다쳤는지 죽어서 노랗게 변했다. 마을에서는 조만간 이 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겠다고 한다.

정자는 1987년 9월 18일에 지었다고 한다. 정자 지붕 안쪽 상량문에 그렇게 적혀 있다. 정자 주변은 평평하게 한 뒤 자갈을 깔아 두었는데, 비가 와도 질퍽거리지 않아 좋다.

마을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주위에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솔안마을까지는 밤나무를 보기 어려웠는데, 유독 외기마을엔 밤나무가 많이 눈에 띠었다.

마을에 들어가 첫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넓은 터를 끼고 있는 마을회관이 나온다. 넓은 공터는 시내버스가 하루 다섯 번 돌아나가는 곳이다.

그리고 마을회관은 2003년 11월에 준공했다고 하는데, 겨울에는 스무 명 정도가 나와 함께 겨울을 보낸다. 솔안마을에 사는 노인들도 이곳 회관을 자주 찾는다. 요즘은 농사에 바빠 찾는 사람이 없다.
 

▲ 외기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 숲과 정자. 마을 숲은 서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이뤄졌는데, 최근 마을에서는 인근 터를 조금 더 사들여 추가로 나무를 심었다.
◆면사무소 있던 큰 마을
지금은 스무 가구 정도만 살고 있는 작은 마을 외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쿠리 안에 마을이 담긴 것 같은 지형이다. 이 마을은 예전에 '산재'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사방으로 고갯길이 많이 흩어져 있어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농지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외기는 꽤 잘 사는 동네였다고 한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을 정도로 마을이 번성했는데, 이곳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지기 전까지 진안현 두미면의 면소재지였다. 이 당시에는 외기마을이 원반월보다 더 컸을 거란 주민들의 설명이다.

면사무소 건물은 20년 전에 허물었다고 한다.
면사무소는 마을 초입에 있는 외딴집 뒤쪽으로 있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면사무소 건물은 관청으로서 위압감을 주는 형태였다. 면사무소에 들어가려면 비교적 높은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관청이었기 때문에 아주 튼튼해 보였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면사무소 창고는 현재 주택이 모여 있는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창고는 면사무소보다 훨씬 오래전에 헐렸다.

한 주민은 마을에 이렇다할 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은데, 면사무소 건물이라도 잘 보전했으면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얘기했다.
 

▲ 옥녀봉의 거울에 해당하는 반월저수지
◆옥녀의 기운으로 발전
외기마을 앞의 높지 않은 산은 풍수지리상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산의 이름은 옥녀봉(709.8m)인데, 외기마을은 이 산 아래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남평 남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전한다.

초창기 외기마을은 빈촌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으니 농업이 주였던 당시 시대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한 풍수지리학자가 마을을 찾아오더니, "옥녀가 거울을 봐야 하는데, 거울이 없어 마을이 발전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후에 마을에서 마이산 방향으로 커다란 저수지(반월저수지)가 생긴 뒤로는 마을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많은 인물도 배출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거울'이 물이나 저수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외기마을의 지형은 '옥녀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단장하고 신선과 어울리는 형세'가 됐다.

외기마을에서 가림리 옥산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를 '밀고개'라고 부르는데, '옥녀가 사용하는 밀기름 단지'가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밀기름은 밀랍과 참기름을 섞어 만든 머릿기름이다. 그리고 '선인동'이란 지명도 있는데, 옥녀가 신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저수지를 만들고 유독 많은 대학생과 공직자를 배출했을 만큼 좋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노인이 대다수다.
한때는 성씨가 모여 산다는 '성터', 안씨가 모여 산다는 '안터'가 있을 만큼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젊은이들은 진학과 취업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여느 가난한 농촌마을의 모습처럼 외기 역시 그랬다.
 

▲ 마을의 뿌리와 마찬가지인 옥녀봉
◆재해 없는 평화로운 마을
마을을 둘러보다 머리에 망을 쓰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정인수(72)씨를 만났다. 정인수씨는 토종벌이 잔뜩 메달린 멍덕(짚으로 만든 임시 벌집)을 그물망에 넣어 옮기는 중이었다. 이것을 새 벌집에 옮기면 새 벌통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정인수씨는 외기마을의 노인회장과 게이트볼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젊어서는 공직에 있다가 9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토종벌을 치고 있다. 32년 만의 귀향이라고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지금이야 사람이 떠나 마을이 많이 위축됐지만, 참 살기 좋은 곳인 것은 분명해요."

정인수씨가 말하는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는 자녀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성장하고, 큰 부자는 없어도 모두가 큰 걱정 없이 먹고살 만큼은 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어렸을 때는 특별하게 장수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대부분 여든 살 이상은 살다가 가시는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도 아흔이 넘도록 살아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고, 이웃집을 봐도 여든까지는 거뜬히 사시더라고요."
 

▲ 마을약도
◆기록에 있는 춘수재
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을 살펴보던 중에 주민들로부터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외기 북쪽으로 소태배기라는 터가 있는데, 이곳은 예전에 솟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솟대라는 것이 민속신앙에서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거나 마을의 안녕을 빌며 세운 긴 나무 장대인데, 이곳에서 마을 공동체가 참여하는 집단 의식이 있었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다.

또 춘수재(春睡齋)라는 재각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옥녀봉 아래에 있던 김해 김씨 재각으로, 감역(監役) 김해인(金海人) 김봉배(金鳳培)의 묘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재각은 기와 3칸에 고사 3칸 규모였다고 전해지는데, 진안향토문화백과사전은 진안지(鎭安誌, 진안향교, 1925)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 2003년에 지은 외기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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