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1 진안읍 반월리 … (6·마지막)지매실(금마곡)

▲ 지매실 안쪽에 있는 당산나무. 수령이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매실(금마곡)은 진안읍 반월리에 속한 자연마을이지만, 반월리의 다른 마을과는 동떨어져 있다. 원반월과는 산줄기로 경계를 이루고 있고, 진입로도 반월리 쪽이 아닌 단양리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이어져 있다.
원단양을 거쳐 최근 포장한 것으로 보이는 깔끔한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 다리 밑을 지나 마을이 나온다.
마을은 진입로 방향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으로 막혀 있다. 하지만, 산이 나지막해 그리 깊은 골짜기가 있는 산골마을은 아니다.
 
◆지매실 마을은?
지매실은 1700년께 원주 원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졌다고 전한다. 이후에 남원 양씨, 전주 최씨 등이 들어와 살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말이 안장을 풀어놓고 쉬고 있는 '금마탈안(金馬脫鞍)' 형국이라고 해 '금마곡'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친숙한 '지매실'로 부른다.
금마탈안 형국이기 때문에 마을 주변에는 말과 관계있는 지명이 많다. 안장혈, 깔골, 괼봉(고리봉), 원앙봉, 꽃비날, 마두혈, 말맷동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말맷동은 말을 묻어 놓은 묘가 있다는 뜻인데, 옛날에 임금이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다 말이 죽는 바람에 말을 묻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 진안읍 반월리 지매실
◆엄청났던 소나무
지매실에는 크고 작은 숲이 몇 곳 있었단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윗솔용지와 아랫솔용지였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 두 곳은 매우 큰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이었는데, 아랫솔용지는 도로를 내면서 나무를 베어내 없어졌다. 그리고 윗솔용지 역시 숲을 이뤘던 소나무가 죽어 사라졌단다. 한 주민은 "사람 셋이 감싸도 모자랄 만큼 굵고 높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누군가 나무에 불을 질렀다."라며 "당시 나무가 정말 크고 멋있었다."라고 증언했다.

나머지 두 곳은 현재 큰 느티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남아 있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는 심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수령이 100년 안팎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안쪽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에서 당산제를 올리던 나무다. 수령이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기록에는 품격3등급 읍나무라고 적혀 있다.
마침 땔감을 구하러 나온 주예분(83) 할머니로부터 옛날 당산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월만 되면 한 보름씩 풍물을 치면서 놀았어요. 집집마다 풍물을 치면서 돌면 밥과 먹을거리를 내놓았고, 당산제도 크게 지냈어요. 그 때가 참 재미있었지."
지금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 이유다. 노인인구가 많아서다.
 

▲ 진안읍 반월리 지매실
◆몇 가지 이야기들
지매실에는 금광이 있었단다. 마을 아래 고속도로가 난 곳인데, 공사를 하면서 무너졌다고 한다.
또 지매실 맞은 편 산과 뒷산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남자 생식기 모양의 바위는 "두드리면 여자가 바람난다.", 여자 생식기 모양의 바위는 "두드리면 남자가 바람난다."라는 얘기가 전한다.

마을 뒷산 봉우리 하나는 보초막이란 지명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보초를 서는 초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지매실 주변에서는 전투가 없었단다. 보통 고지를 두고 전투가 벌어지기 마련인데, 지매실은 빨치산이 머무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단다. 해발은 높지만, 마을 기준으로 보면 주변 산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 진안읍 반월리 지매실
◆잘 살아서 작아진 마을
1960년대 지매실은 인근에서도 잘 살기로 손꼽히는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까지 이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단다. 그러다 마을에 청년이 늘고 경지면적이 늘어나면서 1960년대에는 60여 가구가 살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이런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마을에서는 교육열이 뜨거웠다. 마을에서는 많은 대학생이 배출됐고, 평균 한 집에 한 명꼴로 공직자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부메랑이 돼서 돌아왔다. 공부를 위해, 또는 공직생활을 위해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다른 농촌마을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매실은 인구 유출 정도가 아주 심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절반이 넘는 23가구만 마을에 남아있다. 인구도 30여 명뿐이다. 노인 인구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있어 다른 농촌마을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아 보인다.

마을 살림을 보고 있는 원종배 이장이 올해 44세이고, 그 위아래로 여러 젊은 사람이 있다. 또 많지는 않지만 고향을 떠났던 젊은 사람들이 귀농을 하고 있어 그래도 마을엔 활기가 넘친다.
"젊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을에 어린 학생들이 없어요. 어린이가 없다는 건 마을에 미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큰일입니다."
 

▲ 진안읍 반월리 지매실
◆우리도 반월리 사람들
앞서 얘기했듯이 지매실은 반월리의 다른 마을과 동떨어져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이다.

옛날에는 원반월과 한 마을처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다녀야 도로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마을 앞 고리봉을 넘는 길이 주도로였다. 지적도에는 지금도 폭 1.5m~2m의 길이 표시돼 있는데, 옛날에는 지금의 국도와 같은 중요한 길이었다. 당시에는 말과 나귀가 다녔을 그런 길이었는데, 임실군과 장수군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반월리 사람들이 모두 반월초등학교에 다녔으니까 한 마을이나 다름없었죠. 고리봉 산길도 그리 높지 않아서 다니기 불편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이용하지 않다 보니 좁은 오솔길이 되어 버렸어요."
 
◆고구마 직거래로 수익향상
지매실은 10여 년 전부터 고구마 직거래로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다. 고구마 직거래는 한 목사가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게 점차 주민들에게까지 보급돼 지금은 고구마가 없어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매실이 1년에 고구마로 올리는 조수익이 4~5천만 원이라고 하는데, 노인들이 소일거리로 짓는 것치고는 꽤 중요한 소득원이다. 지금은 열다섯 농가가 작목반을 구성해 고품질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다.

"우리 마을이 토질이 아주 좋아요. 그래서 고구마 맛이 기가 막힙니다. 아마 고구마 직거래는 우리 마을이 진안읍에서 가장 처음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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