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문화재 탐방

▲ 굳게 닫힌 문으로 인해 멀리서 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지방기념물 81호
·백운면 반송리 360-2
 
백운면 면소재지를 지나 반송리 원반송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정각쏘(지나던 동네 할머니는 물길이 제법 센 천이라며 정각쏘라고 부른다고 얘기하셨다.)가 시원한 물바람을 주며 흐른다.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는 이처럼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져 세워져 있다.

1992년 6월 20일 지방기념물 81호로 지정된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 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 에 건립되었다.

최양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던 고려말 충신이다. 정몽주의 조카로 과거에 장원급제 한 후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으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린 뒤 진안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 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훗날 최양이 죽자 세종은 "학문과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와 청직은 엄광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짓도록 하였다. 전주의 서산서원, 공주의 고암서원, 임실의 덕암서원 그리고 진안의 영계서원에서 최양을 모시고 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크기는 높이 145m 폭 60m이며, 비의 전면에는 "晩六崔瀁先生遯跡遺墟碑" 라 새겨져있다. 선생이 산중으로 도피하던 중 잠시 머물렀던 곳에 비를 세워두었으며, 비문은 노사 기정진이 지었다.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 긴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문화재를 굳게 닫힌 문으로 인해 담장 밖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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