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2 상전면 갈현리 … 중기·신전·월갈현·대곡

▲ 상전면 갈현리 약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용담댐이 장맛비에 물이 불어날 것을 대비하려고 했는지 물이 차있어야 할 용담호 가장자리는 수풀이 무성했다.

상전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시작하는 곳 초입. '상전공설묘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중기마을'의 존재를 알리는 마을비석도 서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가 간신히 교행할만한 넓이의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골짜기는 더 깊어진다. 도로 왼쪽에는 골짜기의 굴곡과 경사를 따라 개간해 놓은 논밭이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그리고 널찍한 공터를 끼고 있는 '중기마을'이 나온다.
 
◆갈현리 네 마을, 지금은 하나
'갈현'이라는 이름은 뒷산에 칡이 많고 베루(벼랑)를 넘어 왕래한다고 해 유래했는데, '갈베루', '갈연', '갈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상산정리(上山亭里), 신전리(新田里), 중기리(中基里)를 병합해 지금의 갈현리가 됐다.

하지만, 모든 마을이 용담호에 잠겼다. 물에 잠기기 전 중기에는 서른 집, 원갈현에 마흔 집, 대곡과 신전에는 각각 스무 집 정도가 살았다고 하니 모두 합치면 100가구가 넘었다.

그나마 중터 뒷산 골짜기에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 있어 일부 주민들이 다시 터를 닦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갈현리'에는 중기마을 하나만 남았다.
물 건너 '원갈현'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딱 한 집만 있기 때문에 마을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마을회관 옥상에서 본 중기마을.
◆유난히 전통풍습 많던 중기
'중기'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일부는 마을 앞 냇가에 중바우라는 바위가 있어 '중터'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고, 일부는 봉오재 중턱에 절이 있어(지금은 터만 있다.) '중이 산다.'라는 의미의 '중터'가 됐다고 얘기한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대규모 마을행사로 유명했단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당산제를 지냈는데, 제를 올리기까지 과정이 매우 엄격했다고 전해진다.

'팥죽제'라는 것도 있었다. 본래 중기교에서 거리제 형식으로 지내다 당산제로 통합됐다. 당산제가 끝날 무렵 마을 여성들은 당산에 가져다 둔 팥죽을 당산 주변에 뿌렸다.

'뱅이'라는 풍습도 재미있다. 전염병이 돌면 마을 여성들이 밤에 회사나 갈현마을에 가서 몰래 디딜방아를 훔쳐와 방아실(디딜방아가 있던 곳) 앞에 거꾸로 세워놓고 밥 한 그릇을 올리며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풍년을 기원하는 농신제도 지냈다.
 
◆기억만 남은 세 마을
대곡은 큰골, 상산정 등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마을 북서쪽 큰골안골이란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신전은 섶반이라고도 불렀는데, 서쪽으로 향한 반월형 숲이 있고 여기에서 땔나무(섶)를 가져다 사용해 붙인 이름이다.

원갈현은 갈베루라고 불리던 마을이다. 갈현리 네 마을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고, 중심마을이란 의미로 '원갈현'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는 산제를 지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면 정성이 부족하다고 해 다시 지냈다고 한다.
 

▲ 김재원(82)씨와 김씨의 조카 김순덕(71)씨. 김재원씨는 중기 남자 주민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중기에서 만난 사람들
중기마을 남성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재원(82)씨를 만났다. 고구마 줄기 한 다발을 들고 온 조카 김순덕(71)씨와 이야기중이었다.

"우리 집안이 중터에서만 5대가 이어졌어요. 손자가 손자를 낳았으니까 말이야."
여든이 넘은 나이였지만 지금도 밭일을 힘있게 한다며 김순덕씨가 이야기를 거든다.

"귀만 조금 어두우시지 아주 정정하셔요."
김재원씨가 마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모르는 게 없다.
"원래 여기에도 두 집이 살았어요. 그러다 중터가 물에 잠기면서 이쪽으로 몇 집이 이사 온 거죠. 여기는 옛날부터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면서 김재원씨는 구름이 걸쳐 있는 봉오재를 가리켰다.
"봉오재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엄청 깊어요. 그래서 예전 전쟁 때는 여기가 피난처였어요. 지금도 길에서 보면 여기에 마을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김재원씨는 봉오재까지 올라가는 데 두어 시간 걸린다고 했다. 날이 좋으면 정상에서 군산 앞바다가 보인다고 하는데, 보기보다 해발이 꽤 높은 모양이다.
"우리 마을엔 열다섯 명만 살고 있어요. 전부 노인네들뿐이지."

마을이 물에 잠겨 이곳으로 이사 온 뒤 가장 어려웠던 건, 농사지을 마땅한 땅이 없었다는 것이다. 산골짜기 마을에 평평한 곳은 모두 집을 지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김순덕씨가 옛 마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땐 정말 재미있었어요. 크고 작은 마을행사가 열리면 온 동네가 들썩거리고 신명이 났어요. 그런데 댐 만든다고 다 쫓아낸 거예요."
김재원씨와 김순덕씨의 추억에는 아픔이 서려 있었다.

▲ 이주 마을이라 주택이 대부분 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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