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53 마령면 평지리 … (1)원평지

▲ 원평지 도로 건너편 공터. 큰 나무와 모정, 운동기구가 있어 마을 주민의 쉼터 구실을 하는 곳이다. 또 1995년에 건립한 오기열 기적비가 서 있다.
넓은 뜰이 펼쳐져 마을 이름도 '평지리(平地里)'다. '사방 10리'라고 이야기할 만큼 경지정리가 잘된 넓은 경작지가 있는 곳이다. 간혹 사람들은 진안군은 물론 이웃 장수군이나 무주군을 통틀어 가장 넓은 뜰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평지리는 다섯 행정리로 이뤄져 있다. 본래 평지리의 중심마을이었던 원평지, 모래가 많이 난다는 모사실(사곡), 돌다리를 건너다녔다는 석교(독다리), 풍수상 평사낙안(平沙落雁) 형국이라는 송내(솔안)이 다섯 행정리다.

평지리는 넓은 농경지를 끼고 있는 만큼 일찌감치 마령면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있으며, 학교와 면사무소를 비롯해 농협과 우체국 등도 이 마을에 있다.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인구유출과 노령화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고장에서는 손으로 꼽는 큰 마을이 평지리다. /편집자

▲ 300년 된 느티나무. 늙은 은행나무가 죽은 뒤 당산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넓게 펼쳐진 마을 원평지
원평지는 완만하게 뻗은 산줄기 아래 넓게 자리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큰 마을이다.
마을 앞 도로 가에는 도정공장과 농협창고 등이 즐비하고, 마을 중간쯤에는 넓은 마당이 있는 마을회관이 눈에 띈다.

원평지에는 특이하게 모정이 세 곳 있다. 하나는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 있고, 나머지 둘은 마을 양쪽 끝에 하나씩 있다. 특히 마을 양쪽 끝 두 정자는 남성들과 여성들이 나누어 이용한다.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닐 텐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굳어진 것 같다.

마을회관 옆에는 낡은 노인정도 있다. 노인회 현판이 있어 노인정이란 것을 알 수 있는데, 겉보기에는 일반 주택과 다르지 않다.

마을엔 사적도 여럿 있다. 마을 오른쪽 큰길 가에 있는 용계사는 추모재 최두칠(崔斗七)을 배향한 사당으로 조선 철종 11년(1860)에 창건된 곳이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은 뒤 1980년 현위치에 복원됐다.

도정공장 옆에는 '오성복 오빈 정려(吳成福吳玭旌閭)'도 있다. 효자 오성복과 충신 오빈(吳玭)의 정려를 하나의 정려각에 모신 것이다.

이 밖에도 마을 앞 냇가에는 쌍계정, 시루봉 아래 만취정 같은 정자가 있는데 선비들이 계를 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마령면에서 가장 큰 마을
원평지의 유래는 옛날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완산주 99현 가운데 1현인 마돌현 때부터 이뤄졌다고 하는데, 경지정리 당시 마을에서 고인돌 모양의 큰 바위가 나왔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실제 사람이 거주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 지석묘(고인돌) 여섯 기가 나왔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170가구가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는데, 마령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당시 마을은 마을 앞길 건너 논밭까지 주택이 있었고, 그때 사용하던 길에는 주막거리가 형성돼 있을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 규모가 커서 몇 곳은 별도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던 온곡과 구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집이 모두 뜯기고 논밭이 됐다. 또 원평지는 상평지, 하평지로 나눠 부르기도 했다.

지금도 8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진안읍을 제외하면 진안군 농촌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큰 마을이었던 만큼, 본래 원평지가 면소재지였다. 조선 태종 13년에 폐현이 되기 전까지 현이 설치돼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면사무소(지소라는 얘기도 했다.)가 있었다.

현재 정자나무(느티나무)가 있는 곳 아래가 현청(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러다 지금의 평산(시장)으로 도로가 나면서 면소재지가 옮겨갔다.
 

▲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당산제
이 마을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다. 마을 안쪽에 있는 느티나무인데, 1982년 전라북도에서 지정한 보호수이기도 하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올리며 풍물을 쳤는데,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월만 되면 누군가 나무 아래에 막걸리와 먹을거리를 두고 제를 올린 흔적을 볼 수 있단다.

그런데 이 마을의 당산제는 본래 다른 곳에서 지냈다. 마을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곳을 윗당산이라고 불렀다. 또 돌탑이 있던 아랫당산에서도 제를 올렸는데, 그래서 원평지의 당산제는 두 번씩 진행됐다.

당산제를 지낼 때면 먼발치에 호랑이가 나와 있었다고 전한다. 제를 지낼 때 부정이 있으면 이 호랑이는 개를 물어가는 등 마을에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은행나무는 경지정리를 하기 전인 20여 년 전에 죽었고, 돌탑은 정확한 증언을 들을 수 없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제헌 국회의원 배출한 마을
원평지에서 도로 건너편에는 큰 나무와 모정,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가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비석도 하나 서 있는데, 특히 눈에 띈다.

1995년에 건립한 오기열 기적비는 이 마을 출신 오기열(吳基烈. 1868~1951)이란 인물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기미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지고 한 달이 지난 4월 6일, 전영상(全永祥), 김구영(金龜永), 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평지리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장날인 4월 13일에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비석 옆 정자에서 쉬고 있는 정종수(68), 오성현(70)씨는 원평지가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라며, 이게 모두 지형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마을이 뒷산 산세처럼 사람들이 모나지 않고 순박한데, 그러면서도 인물이 끊이지 않고 배출됐어요. 지금이야 공부 잘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갔지만, 그래도 국회의원도 나왔잖아요. 이게 모두 산세가 좋아서 그런 모양이에요."

또 모나지 않은 산세 덕에 마을 인심이 후덕하다는 게 두 사람의 설명이었다. 오씨와 최씨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텃세가 없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 수 있었더란다.

"사실 나는 여기 토박이가 아닌데, 이렇게 다녀보면 여기는 텃세가 없어요. 보면 암석이 많은 산을 낀 마을은 사람들이 거친 면이 있는데, 우리 마을은 정 반대거든요."

▲ 마령면 평지리 원평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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