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 지역문화창달의 의미(2)
생존 소설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

글 싣는 순서

1회: 지역문화 창달의 의미

2회: 생존 소설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

3회: 정지용 문학관 개관의 의미
4회: 이외수 소설가 영입, 지역의 득과 싶
5회: 황석영 소설가 영입, 지역의 득과 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
곡창지대로 잘 알려진 김제평야는 여전히 드넓은 들녘을 자랑하고 있었다. 들녘에서 자라는 초록빛 물결이 마치 부드러운 바람에 수줍게 물결치고 있는 모습이다.

곡창지대로 잘 알려진 김제평야는 여전히 드넓은 들녘을 자랑하고 있었다. 들녘에서 자라는 초록빛 물결이 마치 부드러운 바람에 수줍게 물결치고 있는 모습이다.

초록빛 물결이 가득한 끝은 하늘과 맞닿아 김제에서 지평선 축제를 하고 있는 이유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초록빛 물결은 곧 있으면 황금빛 물결로 옷을 갈아입고 출렁일 것이다. 그리고 지평선축제를 선보일 것이다.

이곳이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약탈당했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군침을 흘릴 만한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잠시나마 머릿속을 스쳤다.

일제강점기에 김제를 비롯한 전북지역 농지의 80% 이상을 일본인이 소유했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하시모토의 교본농장 등 9개 농장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도 일제강점기에 대지주 중 한 명인 구 하시모토농장사무실 건물이 김제 부량면에 남아있다.

▲ 대하소설 아리랑을 집필한 200자 원고지 2만매. 4년 8개월 동안 쓴 조정래 작가의 원본이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제, 아리랑 문학관
대하소설 아리랑의 발원지에 아리랑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폐교를 활용한 아리랑 문학관은 2003년 5월 16일에 김제 벽골제 박물관단지 내에 마련됐다. 아리랑 문학관은 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김제시는 일제강점기를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되었던 김제 만경강 들의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아리랑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소설 아리랑이 김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성희 전략사업추진단장은 "조정래 선생은 김제에서 소설 아리랑의 취재활동을 시작해 12권의 대하소설을 완성하게 됐다."라며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인 죽산리 내촌마을과 외리마을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를 조명하고 있어 아리랑 문학관을 건립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인 아리랑 문학관은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에 있다. 조정래 작가는 이곳에 아리랑을 집필할 때 사용한 개인소장품 350점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아리랑 문학관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유리관에 보관된 200자 원고지 2만 매의 아리랑 원고지다. 원고지는 웬만한 성인의 키보다 높았다. 4년 8개월 동안 쓴 원본이 그대로 보관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아리랑 문학관은 제1·2·3전시실로 나눠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실에는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낱장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아리랑' 원고가 전시되어있었다. 첫 페이지 원고 내용에는 '초록빛으로 넘치는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넓은 들은 한낮의 생기를 잃고 야릇한 적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며 들판에는….'으로 시작하고 있다.

또한, 소설 아리랑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제 내촌과 외리 사람들의 생존과 독립운동 그리고 강제인력수탈과 야합 등의 선택의 갈림길에서의 대응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험난한 대장정이 각 부의 줄거리와 함께 시각자료로 제공되어 있다.

이외의 전시실에는 작가연보와 작품연보를 사진으로 볼 수 있었으며, 조정래 작가의 인생 및 취재 시 일용품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좇아 빼곡히 정리된 취재수첩 및 자료노트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 작가의 가족사진과 애장품,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사용한 펜과 안경, 작가가 손수 그린 자화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군에서 영입을 추진하고 있는 황석영 작가와 마찬가지로 조정래 작가 고향도 김제는 아니다. 그나마 대작 '아리랑'의 배경이 되었다는 작지 않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적 호응을 끌어내는데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다.

김제의 예를 놓고 볼 때 우리 군이 황석영 작가 영입을 추진하면서 군민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아리랑 문학관 제1전시실에는 아리랑의 첫 장을 장식한 내용이 보관되어 있다.

·인터뷰 … 아리랑 문학관 정윤숙 학예사·

"자치단체의 지속적 관심과 운영의지 필요"

아리랑 문학관이 건립되고 난 후에 연구사로 임용을 받은 정윤숙 학예사. 올해로 만 4년이 되었다. 그가 평가하고 있는 아리랑 문학관은 김제의 벽골제와 문화사를 연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아리랑은 문학으로 재구성한 근대사라 할 만합니다. 이와 별도로 김제라는 땅의 문화사적 가치를 끌어올리는데 더할 나위 없는 장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리랑의 가치가 도드라져 지역민에게 내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앞으로 아리랑이 드러내는 제 가치를 김제와 묶어 놓으면 지역민이 인식하지 못한 이 땅의 가치를 충분히 그리고 깊이 있게 녹여낼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조정래 작가가 김제에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것 같다.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시각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리랑을 통한 만남과 문학관 개관으로 조정래 작가는 김제시의 명예시민 1호이시지만 김제시민들에게 아직은 정서적으로 먼 분인 것 같아요. 인정하기 싫지만 무서울 정도로 삶의 형편이 문화에 대한 욕구를 제어하고 있으니 열악한 지자체의 형편 속에서 지역문화에 집중하기 어렵고 또 사상적 무게로 인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렵죠. 하지만, 앞으로의 문화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큰 문화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아리랑 문학관에 대한 개선점과 보완점이 있는 것 같다.
"현재 전문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사회교육 및 특별전 등 박물관사업이 가동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앞으로 조직 내 인식을 바꾸어 이와 같은 박물관활동이 이루어져 더 많은 관람객을 창출해내고 가치를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점이죠."

타 자치단체에서 문학관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함도 강조했다.
"자치단체 행정조직의 아쉬움은 시설 인프라의 건립에서 사업이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건립은 첫 삽을 뜬 것이며, 그를 기점으로 어떻게 내용을 확장해내고 내실을 만들어 갈 것인지가 풀어내야 할 과제이죠. 진안이 황석영 선생을 유치하려면 문학관 건립 후 인력과 예산을 어떻게 투입해 그 문화공간이 진정 지역과 지역 외를 소통시킬 수 있는 지가 우선 고민되어야 합니다만 경험으로 판단컨대 어려우시라 사료됩니다. 다만, 이는 매우 큰 한계이므로 분명히 짚어서 방향의 모색을 화두로 삼아야겠죠."

아리랑 문학관은 2003년 5월, 첫해 개관하고 공식적으로 방문한 방문자는 4만 347명이다. 올해까지 18만 명이 문학관을 방문했다. 벽골제의 경우는 2001년 45만 명이 방문했으며 2007년까지 120만 명이 방문하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아리랑 문학관은 벽골제에 많은 영향도 받았겠지만 자체적으로도 인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리랑 문학관은 벽골제의 영향도 크지만 문학관 자체만으로도 내외에 상당한 마니아를 두고 있어요. 하지만, 아리랑문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방문하는지는 별도로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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