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김주환 진안치과 원장

공자는 논어의 자로(子路)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군자는 화목하되 부하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다."고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강의'에서 다르게 해설하고 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는 것이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관용과 공존의 논리이고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라고 했다.

송나라의 저공(狙公,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말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저공이 다시 원숭이들에게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삼모사의 뜻을 '거짓된 방법으로 남을 속이고 우롱하는 말장난'으로 이해하고 인용한다. 그러나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조삼모사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화를 내거나 기뻐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원숭이 키우는 사람은 원숭이가 옳다고 한 것을 따랐을 뿐이며, 원숭이 또한 어리석어 말장난에 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 좋고 나쁘다는 판단은 도토리를 주는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결국 도토리를 먹는 원숭이의 판단이 우선해야하고, 그 판단을 존중한 저공이 옳다는 것이 장자의 철학이다.

개인이 타자(예를 들자면 조삼모사의 원숭이와 같은 낯선 상대)를 만났을 때, 자신의 판단에만 근거하게 되면 타자와 대립하고 갈등이 유발된다. 타자의 시비 판단에 따르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중지하여 마음을 비워 두어야한다고 했다.

타자와 마주할 때, 옳고 그름에 관해 타자의 판단에 근거하면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먹이를 주는 사람보다는 먹이를 필요로 하는 원숭이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신영복 선생의 화이부동에서 화(和)는 연대를 의미한다.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성과 연대가 약자가 가진 큰 힘이다. 사회적 강자인 지배자(소인)는 동을 요구한다.

자신의 가치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강자를 따르기만을, 절대적 복종을 요구한다. 말 잘 들으면 잘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약자인 소수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강자의 힘에 눌려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강자의 힘과 논리를 넘을 수 있는 것이 연대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무차별하고 불공정한 경쟁 시대에서는 이 사회에서 숫 적인 다수이다.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자인 소수로 고립되거나 분산되어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소수인 강자에게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올바르지 못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연대인 것이다. 폭력적 지배와 억압이 일상화된 이 사회에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이 사회의 강자는 끊임없이 약자에게 억압과 폭력을 행사한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위해 한미FTA를 하려한다. 재벌과 대기업을 위해 농민과 비정규직등 사회적 약자는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어떠한 범죄행위를 저질러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지만, 촛불 시위를 하는 시민은 처벌 대상이 된다. 미국산 소의 광우병 위험성을 알려 쇠고기 수입 협상을 신중히 처리해야한다는 주장을 한 'PD 수첩'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농민의 문제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고 비정규직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실천이 요구된다. 파업을 하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못하는 농민은, 한미FTA 로 피해를 받게 되는 농민을 위해 함께 해줄 연대의 동료를 버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연대의 중요성이고 필요성이다. 한반도 대운하와 공기업 민영화 문제도 이 모든 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가 한반도 대운하를 포기하는 결과를 만든 것 또한 이 연대의 힘이다.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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