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 지역문화창달의 의미(3)
정지용 선생 발자취 찾아 지역으로 모여든다

글 싣는 순서

1회: 지역문화 창달의 의미

2회: 생존 소설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

3회: 정지용 문학관 개관의 의미
4회: 이외수 소설가 영입, 지역의 득과 싶
5회: 황석영 소설가 영입, 지역의 득과 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정지용은 누구인가
정지용은 향수를 쓴 시인이다. 고향을 그리워 지은 시가 노래가 되었다.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인 향수는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씨에 의해 불리었다.

작곡가 김희갑씨가 이동원과 박인수 두 사람의 음역과 음색을 연구하고 분석하기 위해 8개월에 걸쳐 만들어 낸 작품이다.

월북시인 정지용의 시는 그렇게 노래로 재탄생되면서 '향수'는 한국가요를 한 단계 올려놓은 역작이 되었다. 아마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거나 불러보았을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후 정지용 시인은 아홉 살의 나이로 4년제인 옥천 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 입학해 1914년 4회로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 후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열두 살 때 동갑인 영동 사람 송재숙과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열일곱 살(1918)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해 '퐁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 대학 영문과를 입학해 졸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한국전쟁과 함께 정지용 시인은 최후를 맞았다.

▲ 정지용 문학관
지용 문학관을 찾아서
정지용 문학관 주차장에 들어서면 물레방아와 정지용 동상이 관람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생가를 복원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지용유적 제1호로 쓰인 동판에 '명시(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년 음력 5월 15일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실개천 지용회는 지역사람들이 긍지를 갖고 발자취를 스스로 되짚어보자는 마음에서 지용회를 창립한 것이라고 한다.

정지용 생가 안쪽에는 정지용 시인의 초상화와 함께 정지용 시인이 지은 '할아버지' 등의 글이 액자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정지용 생가를 나와 들른 곳이 정지용 문학관이다. 문학관 입구를 들어서면 정지용 시인을 재연해 놓은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문학관 안쪽에서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노래로 불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1946년 건설출판사에서 발간되었던 정지용 시집이 보관되어있다. 이 시집은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것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정지용 문학관 개관의 의미

정지용 문학관은 2005년 5월 14일 개관했다. 정지용 시인의 생일이 양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일에 맞춰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관을 찾아오는 관람객은 다양하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은 물론 대학교 문학 창작학과 학생 그리고 정지용 시인을 따르는 회원, 가족단위에서부터 교직자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렇게 찾아오는 관람객은 하루 평균 80명이다. 연 관람객은 2만 9천200여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또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발전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문화체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손으로 느끼는 시와 영상시화 그리고 향수영상 등 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마련은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정지용 문학관 개관은 옥천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었다. 먼저, 문학관에 전시된 140여 편의 시 가운데 '향수'는 어린시절의 공간을 시로 녹여내 널리 알려진 시이다. 고향 옥천을 그리는 대표적인 시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천재시인으로 불리는 정지용 시인의 삶의 역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 보면서 김성장 시인은 "한국전쟁의 행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아니한 채 1990년대에 새롭게 빛을 내기 시작한 정지용의 시문학은 30년대 한국 문단의 새로운 길 하나를 열어간 시인이 지금 옥천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정지용 생가

▲ 김정길 해설사
인터뷰 … 정지용 문학관에는 김정길 옥천 문화 관광 해설사

한국의 대표 시인 정지용 그는 한국전쟁과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발자취는 정지용 문학관을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으며 옥천 문화 관광 해설사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정지용 시인의 작품은 88년 3월에 해금 됐죠. 해금 되면서 전국적 구성된 지용회원들이 5월 15일 서울에서 행사를 치렀어요. 이때가 정지용 시인의 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제1회 지용제 행사가 열린 때이다. 전국적으로 400명의 지용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행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지용제 행사는 올해로 21회를 맞았다. 이러한 노력은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건립하는데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지용 선생은 옥천을 떠난 것은 1929년 8월입니다. 이때가 스물여덟 살이었죠. 일본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9월에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해 서울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물여덟 살까지 살았던 생가는 언제쯤인지는 잘 모르지만 팔았어요. 지용회원은 물론 지역에서 정지용 선생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그러면서 96년 가을에 생가를 복원을 시작했어요.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건립하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죠."

정지용 시인이 휘문고등보통학교로 발령받은 이유가 있다. 모교이기도 했지만 교비생(학교의 경비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정지용 선생은 휘문고보에서 학비를 받아 학교를 다녔죠. 그러면서 당시 교장선생과 약속을 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 와 학생들을 가르쳐 줄 것을요. 그래서 16년간 모교를 위해 재직했죠."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먹고살기 어려운 시기이다 보니 정지용 시인의 유품을 보관할 생각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일 아쉬운 점은 정지용 선생의 유품이 한 점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품이 없다 보니 너무 허전하고, 볼 것이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겨를이 없었겠죠. 그나마 지용회와 정지용 선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것을 가져다 놓았죠. 옥천은 머무는 곳이 아닌 거쳐가는 장소로 밖에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머무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군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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