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댐은 할머니의 가게와 함께 행복했던 삶까지 가져가 버렸다
올해로 77세가 된 큰 점방 김씨 할머니는 유난히 큰 점방이 그립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 큰 점방이 있었기에 아들, 딸은 물론이거니와 손자들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넉넉했던, 하루하루가 바빴던 기억이 언제나 새록새록 떠오른다.
딱히 가게 이름도 없었지만 당시 진안사람들은 모두 할머니의 가게를 '큰 점방'이라 불렀다.
"하루에 담배만 팔아도 먹고 살만 했다오. 돈에 여유가 있으니까 가족들도 모두 걱정 없이 행복했지, 그려. 내 젊은 시절을 큰 점방에 바쳤지만 절대 후회한 적은 없었다오. 그러나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되는구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것을 모질도록 가게를 놓을 줄 몰랐지. 지금도 큰 점방은 놓질 못한다오. 물론 그때보다 손님도 없고 수입도 없지만, 힘들구먼. 큰 점방을 놓기가 참으로 힘들구먼."용담댐에 가게 터를 빼앗기고 할머니는 점방을 정천면 조림초등학교 앞으로 옮겼다.
◆아들 잃고, 가게마저 잃어
할머니는 용담댐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물속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훔친다.
"아직도 물에 안잠기고 버젓이 가게 터가 있다오. 볼 때마다 억장이 억만 번은 무너진다니까. 사람 사는 세상사가 요지경이라지만, 이것 좀 보소. 그렇게 사람이 북적이던 큰 점방이 이렇게 쓸쓸한 곳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소."
그나마도 큰 점방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어 자식농사만큼은 풍년을 이뤘지만 전주에서 교통사고로 아들 하나를 잃는 바람에 이미 마음은 상처를 입을 대로 입어버렸다.
"심장을 바늘로 수천 번을 찔러도 이것보단 나을게요. 돌아가신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남편보다 백배, 천배는 보고 싶다오."나이가 들어 몸의 기능이 하나 둘 정지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눈물샘만은 멈출 줄 모르는 할머니. 이미 아들을 먼저 보낸 지 10년이 지나버렸지만, 아직도 아들은 기억 속에서 연신 "어머니"를 외치며 해맑게 웃고 있다. 아들의 모습을 잠시 생각하던 할머니는 이윽고 또 눈물을 훔친다.
용담댐을 볼 때마다, 너무도 조용한 가게를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다는 할머니. 그리고 이미 늙고 쇠약해져 담배 값 계산마저 시원찮아 이따금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위로하는 할머니. 할머니는 용담댐이 밉다.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기억해야만 하는…
지금의 이마트도 그때의 큰 점방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정천 사거리에 있던 큰 점방은 말 그대로 진안 사람들은 모두가 한번 쯤 들러 온갖 생활 잡화를 챙겨가던 곳이었다. 호롱불 기름에 쌀까지, 큰 점방은 말 그대로 컸다. 없는 것도 없었다.
"안천에서도 쌀을 팔러 왔다오. 담배가 제일 인기였지. 진안으로 가는 사람이든, 용담, 정천으로 가는 사람이든 꼭 들러 담배를 사가곤 했으니까. 그 때 큰 점방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달하는 곳이기도 했구먼."
7년 전 큰 점방의 모습은 할머니에게 있어서는 쉬이 잊혀 지지 않는 곳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도 굳이 옛 큰 점방의 모습을 담으려 했던 것도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버릴 수 없어서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