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57 마령면 평지리 … (마지막)솔안(송내)
도로 하나를 경계로 평산과 이웃해 있는 솔안에는 마령면사무소를 비롯해 마령초·중·고등학교, 농협, 파출소 등이 늘어서 있다. 마령우체국은 평산에 있지만, 사실 한 장소에 모여 있기 때문에 경계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려 때 만들어진 마을
기록에 따르면 솔안마을은 고려 말경에 남양 홍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졌다고 전한다.
이후 이 마을이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백운면과 성수면 등 인근 지역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돼 지금은 각성바지 마을로 보는 게 맞다.
본래 이 마을은 풍수상 평사낙안(平沙落雁) 형국이어서 솔안(率?)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소나무 안쪽'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면서 송내(松內)로 잘못 기재해 지금의 행정리명인 '송내'가 됐단다.
이 때문인지 마을에서는 여전히 '솔안'이라고 칭한다. 마을에서 취재를 진행하면서 "송내"라고 얘기하면 "솔안"이라고 정정해주는 주민이 여럿 있었다.
◆마을의 확장이 멈춰서다
솔안마을에 들어가 보면 구역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을 앞은 학교와 면사무소, 금융기관, 상가가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고, 그 뒤쪽으로는 주택이 밀집해 있다.
지금은 약 예순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백 가구에 육박했기 때문에 좁은 골목이 발달해 있다. 그리고 흙벽으로 만든 전통가옥부터 새로 지은 집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이런 경관으로 미루어보면, 마을이 마을 뒤쪽 산 아래에서 점차 도로 방향으로 확장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이 점차 산에서 마을 앞 평지 쪽으로 확장하면서 시장이 섰고, 시장을 중심으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됐다.
이러한 것은 마을 주민들이 "예전에는 솔안과 평산이 한 마을이었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토대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의 확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멈췄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말이다.
여느 농촌 마을과 마찬가지겠지만, 그나마 솔안은 큰 마을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을이 워낙 커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린다. 일단, 마을 뒤 돌거북을 올려놓은 돌탑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 위 돌탑 옆으로는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늘에는 정자가 있다. 겉모양으로 봐서는 꽤 오래전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정자 안쪽에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싱크대가 설치돼 있다. 싱크대 위 크고 작은 그릇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주 모여 함께 어울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래는 대부분 주택이다. 곳곳에 좁은 공터에는 고추와 채소를 기르는 텃밭을 가꿔놓았는데, 촘촘하게 심어놓은 것이 꽤 재미있다. 주택 대부분은 시멘트 벽돌로 지었지만, 일부 흙으로 만든 전통가옥도 눈에 띈다.
마을 아래쪽 면사무소 뒤편으로 공사가 진행중인 곳이 있다.
마을회관 자리다. 본래 낡은 마을회관이 있었는데, 비가 새는 등 문제가 많아 헐어내고 새로 짓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기초 공사가 진행중인데, 주민이 많아 준공식이 꽤 거창할 것 같다.
마을 양쪽으로는 송산교회와 원불교 마령교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원불교 마령교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영농기술 보급, 항일운동 등 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이 마을에는 거북제라는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마을 뒤 참나무와 소나무 숲 옆으로 돌을 쌓아 만든 탑 위에 돌로 만든 거북을 올려 두었는데, 정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팥죽제를 겸해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거북제는 물에서는 노는 거북을 세워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열었는데, 사곡에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세웠던 짐대와 같은 의미다.
그런데 거북제 전통이 한동안 끊어졌다. 돌거북을 도난당한 것이다. 이후 마을에서는 이 탓이었는지 화재가 빈번했다는 게 주민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다시 거북제를 지내기로 하고, 2002년 다시 돌거북을 모셨다.
거북제를 다시 지내면서 거짓말처럼 화재가 사라졌단다. 정말 돌거북 덕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북제가 '화재예방'을 주민에게 각인시켜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