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거나, 배설을 한다거나, 잠을 잔다거나 하는 일은 남이 대신 해줄 수가 없는 일이다. 나아가 몸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일이나, 생각하는 일은 남이 대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 느낌들은 대동소이하여 사람들은 그 느낌을 공유하기도 한다. 예컨대 달고, 쓰고, 즐겁고, 괴롭고 하는 등의 감각은 비슷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음식을 달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먹어보지 않고도 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적 차이가 심하면 다른 사람의 감각이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지구촌 오지의 종족들이 즐겨먹는 음식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먹기 힘든 경우가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는 김치나 고추장은 매워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음식들을 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들의 고급 정신작용인 예술, 사상, 철학, 종교적 체험 등은 개인 편차가 더욱 심하여 보통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전문적 식견이나 감각에 대하여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중 사상이나 철학 등은 논증이 가능한 분야이므로 노력만 한다면 그 경지를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예술 감각이나 종교적 체험 같은 분야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1820~1903)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설파했다. 인간들은 생로병사가 어떤 원인으로 진행하는지, 나아가 죽음의 저편은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였고, 그 해답을 아는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구원방법을 묻는다.

그래서 가르침대로 종교에 따라 참선(參禪), 기도(祈禱), 치성(致誠) 등의 방법으로 해탈 또는 구원을 받고자 정진한다. 다행히 제자 또는 신자가 굳은 신앙심으로 공력 정진하면 그 길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는 종교에 따라 견성이니 성령접응이니 신통이니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종교적 체험은 부단한 자기 성찰, 또는 절대자에 귀의하는 강력한 신앙심으로 정진하여 거짓 자아의 껍질을 깨뜨리고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았을 때 찾아오는 황홀한 엑스터시이다. 이런 상태를 불가에서는 무아지경, 또는 삼매(三昧)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충만한 기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개인들이 느끼는 절대적 진리인 셈이다.

이런 상태가 오면 신비한 정신체험과 더불어 이적(異蹟)이 나타나기도 한다. 생사를 초극(超克)하는 정신상태가 됨으로써 혹 난치병을 가진 사람이라면 난치병도 치료되는가 하면, 혹은 앞일이 점쳐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도 모를 언어(방언)를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지는 최종의 목적지가 아니라 일시 경유지에 불과하다. 이런 경지를 경험했더라도 계속하여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고 한다. 또는 이런 상태에서 잘못하면 사악한 곳으로 빠지기도 한다. 사교(邪敎)의 지도자들이 대개 이런 경지를 거친 사람들이다.

또 이런 경지를 거친 사람들이 바로 보지 못하거나 또는 주변의 오도나 선동으로 인하여 지독한 독선에 빠지는 수도 있다. 즉 자기 체험만 참된 구원의 발로이고 남의 체험은 거짓이거나 마귀의 꼬드김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렇게 되면 그런 종교적 체험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9.11 때 자살 테러를 가한 열 명 남짓의 청년들은 지하드(聖戰)의 제단에 순교한다고 믿은 이슬람의 신앙심 깊은 전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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