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농악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농악이 농사에만 쓰이는게 아니라 여러 굿판에서 연주하니 농악이라고만 해서는 미흡하다. 예전에는 농악을 일러 풍물굿 또는 풍장굿이라고 해 왔으므로 풍물굿으로 통일하는 편이 합당할 것 같다.

근자에 들어 <김덕수사물놀이패>의 성공에 힘입어 많은 사물놀이패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물놀이라 함은 종래 풍물굿에서의 <소고>를 뺀 꽹과리, 장구, 징, 북의 네 가지를 가지고 실내악에 맞도록 구성한 4인조 악단을 말한다.

이것은 1978년에 <김덕수사물놀이패>가 그 효시였고 이 사물놀이가 망외의 큰 호응을 얻게 되어 이제는 우리의 전통 풍물굿보다도 더욱 대중 속에 파고들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전통풍물굿이 명맥을 잇지 못하고 쇠잔해 버리고, 변형된 사물놀이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우려의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풍물굿은 지방에 따라 치배(풍물굿구성원)의 수나 복색, 가락 등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로 <웃다리풍물>과 <아랫다리풍물>로 나눌 수 있다.

웃다리풍물은 경기, 충청지방의 풍물을 일컫는 말이고 아랫다리풍물은 영남과 호남지방의 풍물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호남지방의 풍물은 다시 <전라좌도풍물>과 <전라우도풍물>로 구별된다.

전라좌도란 전라도 동부지방, 즉 금산, 진안, 무주, 전주, 남원, 임실, 순창, 곡성, 구례 등의 지역을 말하고 전라우도는 서부지역의 평야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라좌도풍물과 우도풍물의 차이점으로는 복식에 있어 좌도풍물이 전립을 쓰는데 우도는 꽃으로 장식된 고깔을 쓴다. 가락은 우도풍물이 우아하고 섬세한데 비해 좌도풍물은 경쾌하고 힘차다.

특히 좌도풍물은 상모놀이가 잘 발달되어 있어 가락과 동작이 잘 어울려 굿판에서 관중과 더불어 놀이 분위기를 잡는 데 압권이라 할만하다.

한때는 진안이 좌도풍물의 총본산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1946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1주년기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한귀동 상쇠가 이끄는 진안 팀이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어 다음해에도 이들이 1등을 차지함으로써 진안풍물(좌도풍물)의 기량과 위상을 만천하에 뽐내게 되었다.

이처럼 좌도풍물이 진안에서 만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한귀동, 장두만, 김달마, 최승표, 김수동, 최상근, 유경학, 조남주, 전왕권 등 좌도가락의 고수들이 우연찮게도 진안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단순히 아마추어 동네굿패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난장판 등에서 포장을 치고 돈을 받고 관객을 입장시키는 <뜬쇠>라고 하는 일종의 「프로」들이었으니 이들이 주축이 된 진안 팀이 연2회 전국대회를 제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성수면 중평마을에 고 김봉열 옹을 중심으로 두렁쇠 가락이 명맥을 보존해 왔고, 뜬쇠로 활약하던 고 조병호 옹이 제자들을 육성하여 진안지방에는 두 개의 다른 장르의 풍물굿이 존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두 분의 스승이 별세한 뒤에 중평굿은 상쇠 이승철을 중심으로 이 지방에서 가락을 이어오고 있지만 뜬쇠가락을 배운 제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진 형편이다.

이 중평굿이 10. 4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민속축제에서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풍물부 우승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역시 진안이 풍물의 본산임을 만천하에 자랑하는 쾌거를 일궈냈다.
장하다. 치배들은 더욱 정진하여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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