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62 진안읍 물곡리 … (1)원물곡

▲ 마을약도
진안읍 도심지에서 살짝 벗어난 물곡리. 구룡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꽤 넓은 뜰을 끼고 있는 곳이다.

본래 진안군 여면 지역으로, 마을 앞 내가 거꾸로 거슬러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물거실, 수도리, 또는 물곡, 문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물곡에 상도치, 하도치, 궁동, 종평리까지 묶어 진안읍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물곡리가 됐다. 모두 다섯 자연마을이다.

다섯 마을 가운데 먼저 찾은 마을은 원물곡이다.
1700년경 이천 서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이뤄졌다고 하는데, 일찌감치 각성바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오히려 유씨들이 많다.

마을엔 약 일흔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 규모는 진안읍에서도 손으로 꼽았다고 하는데,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비교적 젊은 층이 많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원물곡은 넓은 뜰을 끼고 있어 예전부터 부촌에 속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말이다. 농사는 벼와 고추, 인삼을 많이 하는데, 올해는 날씨가 좋아 풍작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표정은 매우 어둡기만 했다. 원물곡에 가기 전날 뉴스에서 실제 농사를 짓지 않는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이 직불금을 수령했다는 보도가 머리기사로 나왔기 때문이다.
 

▲ 마을회관 앞에서 유인수(68, 왼쪽)씨와 전병태(67, 오른쪽)씨가 벼를 널고 있다. 일찍 마을회관에 나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태씨 할머니(83)가 지켜보고 있다.
◆고관대작이 나온다는 지세
고개를 내려가자마자 왼쪽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다. 왼쪽으로 길게 뻗은 도로는 상도치와 하도치를 거쳐 상전면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바로 마을로 이어지는데 원물곡 진입로다.

마을에 들어서면 논 한가운데 커다란 느티나무가 홀로 서있다. 마을 사람들도 나무 나이를 모른다고 한다. 예전에는 매우 보기 좋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많이 늙어 예전만 못하단다.

마을 뒤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더 있다. 예전에 전주시장을 지낸 전한상씨가 정자까지 지어줬다고 하는데, 정자에는 당시 상황이 비석과 현판 등에 기록돼 있다.

예전에 사용했던 돌다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을회관 앞 정자 옆에 뉘어 놓은 널찍한 바위가 그것인데,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다리를 놓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앞치마로 바위를 싸서 날랐다고 한다.

그만큼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다리의 부속물이기에 마을에서 애지중지하는 바위다. 일부 주민은 이 바위를 세워놓자고도 하는데, 마을 앞에 세워두면 선돌이나 장승 구실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들독'이란 바위도 있었단다. 둥그렇게 생긴 이 바위는 무게가 100kg 정도 나갔다고 하는데, 여름에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할 때 사용했던 바위란다.

원물곡 뒷산은 삼태봉으로 풍수지리상 세 정승이 나올 지세라고 한다. 게다가 마을 안산은 여섯 판서가 난다고 하는데, 실제 이 마을에서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꽤 나왔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는 사실 높은 교육열이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60대 주민들은 어렸을 때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글과 예절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마지막 훈장님이었던 한용진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서당의 명맥이 끊겼다.
 

▲ 마을회관 앞 정자. 유월추(83)씨가 운동삼아 산책을 나왔다가 동갑인 태씨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의 나무 아래 옛 다리에 사용한 바위가 있다.
◆마을에서 지내는 두 제사
원물곡에서 지내는 두 제사가 있다.
하나는 팥죽제다. 정월 초이레날 오후 다섯 시쯤 지내는데,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을 시작으로 마을 가운데 있는 당산나무, 마을회관, 마을입구 다리 순서로 제를 올린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고 김중근씨에게 올리는 제사다. 고 김중근씨는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눈을 감기 전 모든 재산을 마을에 헌납했다. 그 후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보름에 자손들을 대신해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 마을 뒤 당산나무. 나무 아래 정자는 전주 시장을 지낸 전한상씨가 지어 마을에 헌납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사진에 보이는 비석과 정자에 있는 현판에 기록돼 있다.
◆"직불금 없애고 매상 늘려야"
원물곡을 찾은 날은 벼베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마을 길 가장자리는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나락이 차지하고 있었고, 들에서는 콤바인이 분주하게 벼를 베고 있었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직불금' 얘기였다. 농사를 짓지 않는 엄한 사람들이 농민들에게 지급해야 할 직불금을 받아갔다는 어제 뉴스에 모두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다.

"농민만 죽는 거야. 수십 마지기 논농사를 지어도 남기는커녕 빚만 느는데, 게다가 있는 놈들이 그렇게 직불금까지 가로채 가져가면 농민들은 죽으란 소리지 뭐."

"한 마지기에 얼마나 드는지 따져 보자고. 비료 한 포대가 전에 9천600원 하던 게 지금은 2만 6천 원 줘야 한다고. 한 마지기에 두 포대를 쓰니까 6만 원정도 들지? 그리고 농약이 3만 원, 건조기 돌리는데 3만 원, 벼를 벨 때 4만 원…. 게다가 수매량은 정해져 있어서 농사 많이 짓는다고 팔지도 못하고."

"쌀만 그런가? 내가 고추농사를 짓는데 농약값만 187만 원이 들었거든? 그런데 매상해보니까 140만 원이더라고. 여기에 인건비, 운반비 같은 거 더하면 완전 손해라고."

"직불금을 없애는 게 오히려 더 나아. 그걸 없애고 그만큼 수매를 더 하면, 실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돌아갈 거 아니겠어? 서울하고 경기도만 그런 게 아니야. 농촌도 찾아보면 수두룩할 거야. 땅만 갖고 있으면서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이 직불금 받아가는 건 이미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야."

1년간 흘린 땀을 수확하는 기쁨은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직불금 사태'는 농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그들의 어깨는 더 무거웠고, 표정은 어두웠다.

▲ 새참을 먹으며 잠깐 쉬고 있는 주민들. 예전과 달리 빵과 맥주 한 병, 커피가 전부다. 왼쪽부터 유경태(76), 유재원(78), 유용석(50), 주두식(52)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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