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은 동물인 이상 미물이나 짐승이나 비슷하여 침입자에 대하여는 생명을 걸고 싸운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비슷하다. 다만 이성의 작용으로 그 정도가 억제되거나 완화되거나 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눈빛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인을 벽안(碧眼)이라 불렀다. 푸른 눈이란 뜻이다. 그런데 어디 푸른 눈 뿐일까. 노랑 눈, 갈색 눈 갖가지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서양인을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렀다. 눈알색이 다른 사람이란 뜻이다.

예전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 스스로 중화(中華)라 했고, 따라서 인종도 자신들이 가장 잘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변 인종을 만(蠻), 적(狄), 융(戎), 이(夷)라 부르며 오랑캐로 여겼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색목인들이었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마르코폴로 같은 상인, 또는 표류 선원들이었는데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견문을 얻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따라서 그들을 오랑캐보다는 낫게 대접하였다.

이웃과 교류가 없는 문화는 정체할 수밖에 없다. 세계각지 오지의 미개인들은 종족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문명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A.J.토인비는 역사의 발전을 '도전과 응전'으로 파악하였다. 즉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같은 도전을 받지 않은 문명은 스스로 멸망해 버렸지만, 오히려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았던 문명 등은 지금까지 찬란하게 발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국가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외지인과 접촉이 없는 지역은 문화가 정체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의식도 변화가 있을 리 없다. 외부로부터의 자극(도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타적인 지역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더 넓은 세상이 있는지를 알기 어려워 발전하기 어렵다.

진안사람들이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너무 쉽게 열어 준다고 배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외지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게 배알이 없기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혹시 외지인이 진안에 들어와 성공을 하면 텃세의 감정으로 심사가 꼬일지는 몰라도 외지인은 두려운 객지에 들어온 사람으로 더욱 도전과 응전의 각오로 열심히 일하여 성공한 것이므로 찬양해야 할 일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고향이라는 안전판에 안주하여 분발하지 않아 발전하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해야 될 일이다.

지금 진안군에는 상당수의 도시출신 객지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들을 귀농인, 귀촌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명칭이야 어떻든 그들은 바깥세상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은 사람들로 진안에 들어온 사연들도 갖가지일 터이다.

토박이의 눈으로 보면 그들이 비뚜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도시의 패잔병들로 보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먹고 사는 문제라면 진안의 조건이 도시에 비해 나을 리 없다. 그들이 진안을 찾은 까닭은 생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의 철학과 정서가 산촌에 어울린다고 믿은 다분히 문화적인 귀촌으로 보인다.

실제로 진안의 여러 문화행사에 그들의 참여는 열심이다. 토박이의 눈에 그들의 행동이 혹시 설게 느껴지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포용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청장년이 버리고 떠난 지역사회의 빈자리를 그들이 훌륭히 대신해 주고 있으니 오히려 대견히 여기고 감사해야 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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