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수몰된 우리지역 유물은 어디로 갔나·

글 싣는 순서
☞ 1회: 진안 수몰의 아픔, 진안 유물의 현실
  2회: 조선대 박물관에 숨겨진 진그늘 마을의 역사
  3회: 진안군 청동기 시대를 옮겨 놓은 국립전주박물관 등
  4회: 지역 출토 유물 관리문제 이대로 좋은가
  5회: 지역 유물 제자리 찾아주기의 의미와 전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우리 지역 주민들은 용담댐 건설로 많은 것을 잃었다. 물론, 수몰민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보상으로 대신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수많은 농토가 물에 잠겨 먹을거리 생산할 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식량자원을 책임질 수 없게 된 것이다.

흙밖에 모르며 살아온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정든 고향을 떠나야했다. 실향민이 된 것이다. 그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향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매장문화재 대부분을 빼앗기는 이중의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군 수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지역에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살펴본다. 지역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을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써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편집자 주

▲ 배정기 씨가 진그늘 유적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곳이 배 씨의 고향, 진그늘 마을이었다고 한다. 물이 빠진 곳에서 진그늘 유적을 발굴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마을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배 씨는 "이북은 통일되면 갈 수 있지만 내 고향은 갈 수 없다"라고 말해 실향민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수몰지역, 유물 어디에 있나?
용담댐 건설로 우리 지역에 수몰된 면적은 31,565,000㎡다. 뼛속까지 아픈 현실에 대해서 진안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야 한다.

물속에 잠긴 곳은 11개 읍·면 중에 1개 읍 5개 면이다. 이렇듯 많은 면적이 물속에 잠기면서 오랜 역사도 함께 잠겼다. 소중히 간직해온 터전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었다.

또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물속에 잠겼다. 매장문화재라는 말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매장문화재란 '발굴 조사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문화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물속에 남아있을 수도 있을 법하다.

수몰된 지역에서 발굴된 우리 지역 매장문화재 가운데 광주광역시에 있는 조선대학교가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견했다. 전북지역에서는 조사된 예가 없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조선대학교에서 발굴한 곳은 정천면 모정리 진그늘마을 이다. 현 장음마을로 이곳에서 구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발굴이 시작된 것은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1993년 4월부터 9월까지 수몰예정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전북대학교를 비롯한 국립전주박물관, 군산대학교박물관 등이 연합팀을 구성해 매장문화재의 부존 가능성이 큰 지역을 대상으로 나눠 발굴 조사를 했다.

그러나 1차 발굴조사결과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유적이 새로이 조사되고, 유적범위가 확대되어 부득이하게 2차 발굴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도 연합팀의 일원으로 용담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호남문화재연구원 학술조사보고에 따르면 신석기시대 생활유적으로 당시의 자연제방 위에서 주거지 3기와 적석노지 53기, 성격미상의 특수유구 3기가 조사됐다.
출토된 유물이 기원전 4천년기 후반과 3천년기 전반, 3천년기 후반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진그늘유적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은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발굴됐다.
진그늘마을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 유적은 돌날 제작기법을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당시 20여 개의 석기 무리와 화덕 자리 그리고 슴베찌르개로 대표되는 석기였다. 발견된 유적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기에 좋은 연구 대상인 것이다.

진그늘 유적은 다른 구석기 유적과 다르게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에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적 앞에 양질의 돌감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아 석기를 생산했던 유적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석기에서 곱게 갈린 자국과 얕게 패인 자국의 자갈돌에서 석기 만들기 이외에 뼈나 뿔을 가공한 행위도 짐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그늘 유적은 구석기인들의 특정 석기의 생산했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이후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은 상전면 용평리, 정천면 모정리·갈용리, 안천면 승금리·안자동 등지에서 빗살무늬토기편 등이 발견됐다. 수몰지역 내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군은 서로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또 영남 서부 내륙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군과 흡사하다고 한다.

정천 갈용리 갈두마을 입구에 발견된 유구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2동과 적석유구 53기, 성격미상의 특수유구 3기 등 발굴조사결과 확인됐다.
이곳에서는 갈판 및 갈돌 등 식물성 식료의 획득과 기공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이외에도 석촉, 석부, 발화석, 지석 등이 발굴됐다.
이는 돌이 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사를 통해 큰 통나무를 이용해 불을 피웠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불의 영향으로 돌이 갈라 터진 점과 굴광 후 불을 피워 재가 남아있는 타원형 재 구덩이가 연접해 있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돌을 한 단으로밖에 쌓지 않고 하부에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은 점에서도 상통한다는 것이다.
조사된 곳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모두 남부지방 신석기문화의 계통에 속한 것이다.
정천면 모정리 모곡마을 일대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확인됐다.
 
◆수몰지구 청동기 첫 발견
청동기 시대는 대부분 지석묘 유적이 차지하고 있다. 지석묘 유적으로는 정천면 진그늘·모곡·여의곡, 안천면 승금·안자동·풍암·수좌동·구곡, 상전면 월포리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거창·합천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석묘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청동기 시대 주거유적은 고인돌 유적에 비해 현저히 적으며, 정천면 농산·여의곡, 안천면 수좌동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용담댐 수몰지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안천면 수좌동 유적이었다. 그러나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파괴가 이루어져 주거지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농산유적과 여의곡유적에서 장방형주거지와 원형주거지가 다수 조사됨으로써 진안 지역 선사문화와 함께 지석묘 집단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정천면 모정리 모곡마을에서 여의곡마을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망덕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출토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토기류와 석기류가 확인됐다. 토기류는 무문토기, 홍도 그리고 지표 채집한 즐문토기편이다.

석기류는 석검, 석촉, 석착, 석부, 석도, 굴지구, 갈돌, 뗀석기 등 다양하다. 묘실의 바닥시설로 사용된 무문토기는 그 기형이 부여 송국리유적 장방형 주거지의 무문토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석기 중 석검, 석촉, 석착은 지석묘의 부장품으로 사용됐다.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여의곡유적과 모곡 지석묘 그리고 국립전주박물관은 안천면 안자동 지석묘과 수좌동 유적 등이 국립전주박물관으로부터 발굴됐다. 망덕유적을 비롯한 인근지역의 지석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양상이 청동기 시대 중기단계의 송국리형 토기문화가 확산되는 시기로 불 수 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이후의 유적으로는 용담면 수천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석관묘에서 청자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석관묘를 비롯해 약 100여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삼국시대의 유적으로는 용담면 황산리·와정유적, 정천면 여의곡 등이 있다. 황산리유적에서는 가야 석관묘가 대규모로 발견되었고, 여의곡유적에서는 백제 석실분 1기가 조사되었다.
용담면 와정유적에서는 주거지와 함께 토성이 조사되었는데 토성은 목책을 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용담면 월계리 등 우리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999점만 국가로 귀속돼 등록됐다는 것이다.

수몰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주민들처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진통을 겪었다. 이제 우리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찾아보고 고향으로 다시 가져오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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