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66 진안읍 물곡리 … (마지막)종평

▲ 마을약도
하늘은 맑고 푸른데, 바람은 싸늘하다. 오랜만에 대입 수학능력시험 한파가 비켜갔다고는 하지만, 부쩍 차가워진 공기는 겨울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는 듯하다.

진안읍 읍내에서 오천리 방향으로 가다 나오는 물곡리 마지막 마을, 종평이다. 도로 왼쪽 나지막한 산을 끼고 늘어선 주택이 한가로워 보인다.

마을 앞 도로 건너편 뜰에는 간혹 겨울에 김장 담글 배추를 수확하는 주민들 모습도 보인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녹색, 그리고 손수레를 끌고 배추밭 곳곳을 누비는 농부의 모습이 밝은 햇빛 아래 잘 어우러진다.
 
◆서나무가 많아 '서남정'
종평(宗坪) 마을은 본래 '서남정'이란 지명으로 불렸다.
구한말 김제에서 구한말 김제에서 밀양(密陽) 박선명(朴善明)이란 사람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후에 김해 김(金)씨, 경주 이(李)씨 등이 함께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마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역사로 보면 인근 마을에 비해 짧은 편이다.

거주민이 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서남정'이라고 불렀다. 마을에 서나무(서어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렀단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왼쪽 경작지 지명을 딴 '마루들(마루뜰)'로 부르기도 했다. 이 지명은 후에 한자로 바뀌어 지금의 '종평'이 됐다.

한때 서른 가구 이상이 살던 이 마을은 지금 스무 가구 남짓만 남았다고 한다. 여느 농촌처럼 직장과 교육을 위해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은 노인들이며, 간혹 인근 도시에 사는 자녀가 논밭을 사놓고 경작하는 경우도 있다.
 

▲ 종평 마을 뒷산에 있는 숫거북
◆화재 막아주는 거북 두 마리
이 마을의 전통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북제'이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화재가 빈번한 곳이었다고 하는데, 실제 한국전쟁 당시에 마을에 큰불이 나서 마을 전체를 태웠다고 한다. 지금 마을에 있는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도 사실은 화재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때 윗집에서 상례를 올리고 고인의 유품을 태우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불이 번져서 주변으로 막 번지기 시작한 거야. 마을이 전부 불에 타버렸지 뭐야."

마을에서 만난 전정순(81)씨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시집왔는데, 그 해에 불이 난 것이다. 당시 불길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순식간에 마을로 번져서 감히 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더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 마을에 불이 난 뒤 마을 외곽의 조금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전기 합선이었는지 무슨 이유에서 갑자기 불이 난 것이었다. 그게 한 3년 전이란다. 다행히 그 집이 주택이 밀집한 곳에서 떨어져 있어 불기가 더는 번지지 않았고, 그 집에 살던 사람도 무사했더란다.

마을에서는 이런 화재의 원인을 주변 지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을 왼쪽에 있는 산이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의 화산(火山)이고, 또 마을 안산 바위에서 화산이 비쳐 마을에 화재가 빈번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 종평 마을 앞 오른쪽 뜰에 있는 암거북
이 때문에 종평 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화재 이후 화재를 막는 거북을 모시는 전통이 이어졌다.
마을 앞 오른쪽 뜰과 마을 뒤 왼쪽 산에 돌탑을 세우고 그 위에 거북이 모양의 돌을 올려놓았는데, 뜰에 있는 게 암거북이고 산에 있는 게 숫거북이다. 암거북은 마을 안산 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며, 숫거북은 화산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있는 거북은 예전에 모셔놓은 돌거북이 아니다. 지금 봐도 새로 깎아 만든 거북이란 걸 알 수 있는데, 진짜 거북은 도난당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마을의 안녕을 위해 모셔놓은 것을 훔쳐갔으니 파렴치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에 마을에서 다시 돌을 깎아 돌탑 위에 올렸고, 암거북은 다시 도난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콘크리트로 단단히 붙여놓았다.

거북제는 음력 정월 초엿새 저녁 7시 무렵에 지낸다고 한다.
섣달 그믐에는 부녀회 주최로 팥죽제도 지냈다. 숫거북, 암거북 순으로 제를 올리고, 예전 다리(거리제)와 건너편 바위(안산) 순으로 돌며 풍물을 쳤다고 한다.
 

▲ 호박을 썰고 있는 전정순씨
◆물곡리 이야기를 마치며
물곡리 다섯 마을(솟터실까지 치면 여섯 마을)을 돌며 푸근하면서도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시기가 논농사 직불금 사태가 터진 시점이어서 농민들의 시름과 한숨소리는 컸지만, 그래도 낯선 나그네에게 많은 이야기를 친절하게 해주는 모습에서 우리네 농촌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 종평 마을 앞 도로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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