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32>

1910년 8월 22일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했으나 전남 구례에 사는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이 소식을 들은 때는 한 달 뒤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황현은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이미 500년인데 나라가 망해도 순사(殉死)하는 선비 하나가 없다 해서야 말이 되는가" 하면서 독을 먹고 순국하였다.

그로부터 36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소식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알게 되었는바 바로 라디오의 덕분이었다.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중대발표가 있다고 하여 라디오에 모여든 사람들은 일왕의 처연한 무조건 항복 소식에 환호작약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라디오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그 방송을 직접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라디오 한 대 값이 지금의 경제규모와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의 가격대라 일반 서민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라디오는 1920년 미국에서 처음 방송되었는데,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꿔 전파를 내보내면 수신기가 그 전자파를 포착하여 다시 소리로 재생시켜주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라디오 수신기의 초기에는 광석라디오라 하여 전파의 동조 장치와 특수 광석을 이용한 검파장치를 통한 전자파를 이어폰으로 듣는 방식을 거쳐 진공관의 발명으로 검파장치와 증폭장치를 거쳐 스피커로 듣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광복 당시 일왕의 항복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이 진공관식 라디오인데 그때 까지는 일본의 전자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라디오는 대부분 미국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제품이 많았다.

6.25 이후 미군 PX에서 제니스 라디오가 흘러 나왔지만 역시 가격이 비싸 서민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싶은 사람들은 광석라디오를 조립하여 듣곤 했다. 필자도 라디오를 들을 요량으로 바리콘과 광석다이오드, 이어폰을 구입하여 조립하여 봤지만 진안에서는 전파가 미약하여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59년 금성사에서 첫 국산라디오를 만들었으나 금성사 신입직원의 석 달 월급에 해당하는 고가라 역시 서민들은 구입하기 힘들었다.
대신 그때쯤 '스피커'라고 부르던 유료 유선방송이 등장하여 음질은 불량하고 방송국 선택권은 없었지만 아쉬우나마 방송을 듣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우리나라에도 간혹 밀수품으로 나도는 경우가 있었으나 역시 너무 비싸 서민들이 손에 넣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트랜지스터의 출현은 스피커가 아닌 값싸게 제대로 된 라디오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한 가닥 통로를 열어주었다. 즉 광석라디오에 트랜지스터로 증폭을 시켜주는 3석 라디오의 출현이 그것이다. 필자도 3석 라디오를 조립하려고 부품을 사봤는데 NEC나 '도시바' 등 모두 일제 부품이라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라디오방의 기사들은 일본과 한국의 기술격차는 50년 이상이라고 하여 퍽 자존심이 상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와 LCD의 최대생산 수출국이라 하니 그때를 생각하면 더욱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첫 국산 라디오로 사운이 융성하게 된 LG도 반도체의 세계최대회사인 삼성전자도 이제는 라디오는 만들지 않는다. 라디오가 TV나 MP3 등에 밀려서 잘 팔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너무 값이 싸져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소니'나 '파나소닉' 같은 일본의 전자회사들은 아직도 다양한 라디오를 생산하고 있다. 돈보다도 처음으로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소형화 상품화에 성공한 일본기업의 자부심이 라디오의 꾸준한 생산의 원동력인 듯하다. 개구리 올챙잇적 시절을 아는 그런 기업정신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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