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창현 <전 진안초등학교 교장>

진안읍내 고추시장 앞에는 제방이 있고 냇물이 흐른다.
어린 시절에 처음 본 제방은 매우 높고 멀리 뻗어 보였다. 안쪽은 지금과는 달리 지대가 매우 낮은 논과 자갈밭이고 제방 바깥쪽은 냇물이 흐르고 그 건너도 지대가 낮은 논이었다.

지금은 제방 높이로 흙을 채우고 고추 시장을 만들어 제방은 예전처럼 높아 보이지도 않는다. 이순(耳順)에 접어들어 제방을 지나다보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곧잘 빨려들곤 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잠시나마 이순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어린 시절 속에 머물게 한다.

제방 앞 냇물은 참으로 깨끗했었다. 붕어, 미꾸라지, 피라미, 이름 모를 각종 물고기들이 헤엄치던 시냇물. 물방개, 물장군, 소금쟁이, 물잠자리들. 제방의 끄트머리에 펼쳐진 뙤약볕 모래밭에는 개미귀신의 함정도 있었다.

개미를 잡아서 함정에 떨어뜨리면 숨어있던 개미귀신이 나와 함정에서 기어 나오려고 기를 쓰던 개미를 모래 속으로 끌고 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책에 쓰여 있던 내용이 정말이구나 하며 개미귀신의 개미 사냥에 탄복하던 모래 밭. 여름 한철 물놀이도 하고 미역 감던 곳. 가끔씩은 가족들의 천렵 터이기도 했다.
제방은 잔디제방이었고 동심과 심장이 함께 뛰던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잔디 씨 수집 숙제가 있으면 의례히 달려가던 잔디제방. 잔디 씨는 따는 둥 마는 둥, 고무신 벗어던지고 이리저리 내 달리며 술래잡기 하고, 달리기 시합도 하던 곳. 제방 비탈은 천연 잔디 미끄럼틀이기도 했다.

메뚜기를 잡으러 메뚜기처럼 뛰던 잔디밭. 해질녘 바지게에 풀을 잔뜩 진 농부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던 곳. 집으로 돌아오며 보았던 집집마다 밥 짓던 굴뚝 연기. 시간을 잊고 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제방 길 위에서 새롭다.

제방의 목가적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어디서 어떤 추억거리를 만들고 있을까?
어린이들이 달리고 뒹굴만한 잔디밭도 없다. 소 몰고 가는 농부도 없고 음매 소리 내며 어미 소를 따라 가던 송아지도 볼 수 없다. 종이로는 종이배를 만든다.

고무신은 하나를 구부려 다른 쪽 고무신에 끼워 물에 띄우면 고무신 돛단배가 된다. 종이배, 고무신 배를 띄우는 어린이도 없다. 앉아 쉬어가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보기 힘든 제방 길이다. 길마저 모래흙과 자갈 대신 아스팔트로 덧입혀진 제방 길이다.

요사이 고추 시장 앞의 제방 길을 건강을 위한 산책길로 활용하는 주민들이 많다. 고추 시장 제방 길은 조금만 손질해도 산책길, 걷고 싶은 길로 바꿀 수가 있다. 얼마 전 제방 천변에 진안고원약초연구회원들과 진안군청에서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회원들은 제방 안쪽에는 약초 꽃밭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수십 년간 나무 한 그루 없던 제방 길에 산수유나무 꽃이 피고 그늘이 생기면 중앙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상쾌한 통학로가 될 것이다. 어린이들이 어린이다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엮어가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방자치 단체가 진안천을 정비할 계획을 수립하는 중이라는 소식도 있다. 하천바닥이나 제방이 너무 의욕적이고 인공적인 콘크리트나 사각형의 화강암 석재보다는 자연스런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 하천 본래 모습에 가깝게 자연스럽게 손질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방 축조의 역사는 길었어도 나무심기의 역사는 없었다.

고추시장 광장 곳곳에 몇 그루라도 느티나무나 팽나무 같은 수령이 긴 나무를 심어, 50년 100년 후에는 우람하게 자라 보기에도 좋은 주민들의 목가적인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졸졸졸 시냇물. 복원된 하천 습지, 꽃길, 녹음길, 차 안다니는 산책 길. 어린들에게는 추억이 각인되는 길. 관광객들에게는 기념촬영의 길. 시간도 잠시 쉬어가는 길.

제방과 하천이 잘 손질되어 걷고 싶은 느림의 산책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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