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의 잡동사니>

어쩌다 거나하게 걸친 상대를 만난 경우 상대가 내 가족의 이름까지를 거명하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그때 서로 만난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또는 잔뜩 취한 사람을 만났을 때, 방금 했던 얘기를 하고 또 반복하여 하는 경우도 자주 접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이런 상태의 술꾼을 만나는 자체가 귀찮고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하는 당사자는 어떨까?

"맞은 사람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잔다."는 속담은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많이 취하여 기억이 없는 경우를 필름이 끊긴다고 하는데 술꾼들은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술꾼이 과음한 뒤 이튿날 괴로운 것은 몸은 숙취로 고통스럽고, 정신은 자책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필름이 끊기어 전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에게 실수는 안 했는지, 집에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을 경우 누구에게 묻기도 그렇고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 서점을 뒤져 <술과 건강>이란 책을 구하여 읽은 결과 그 과학적 인과관계를 알았다.

사람의 뇌에는 대뇌와 소뇌가 있는데 대뇌는 정신분야, 소뇌는 운동신경분야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대뇌 중에도 '해마'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어 대뇌로 연결시켜 주는 기관인데 과음하면 이 해마가 마비되어 경험을 기억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못하여 만취한 뒤의 행동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만취한 상태에서도 상대를 알아보고 자기 집에도 찾아갈까? 하는 의문이 따를 것이다. 답은 해마의 역할이 기억을 입력시키는 기관이지 기억을 재생시키는 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억의 재생은 해마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해마가 술로 마비된 뒤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억을 재생하여 상대와 대화도 하고 자기 집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더 대취하면 대뇌도 마비된다. 이 지경이 되면 노상에다 잠자리를 펴야 한다.

한편 술에 많이 취하면 비틀거리는데 이는 소뇌와 신경계도 마비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취한 사람이 금방 한 소리를 반복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만취되어 해마가 마비되면 금방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또 그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경지(?)는 술꾼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간혹 술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 술꾼의 주정에 대하여 "나도 술을 마셔봤지만 저건 고의야" 하고 악의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기껏 어떤 기회에 자신의 주량에 비해 과음을 하고 고통을 받은 경험이 고작일 것이다. 술을 마시고 고통스럽다면 해마도 긴장하여 잘 마비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상대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 이를테면 '술상무' 같은 사람들은 잘 취하지 않는다. 아니 취해서는 안 된다. 취해서 해롱대다가는 술상무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상무의 해마는 늘 긴장되어 있기 때문에 술이 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술을 마시는 것은 세상사 이런저런 일을 풀어버리자는 건데 풀진 못하고 알콜로 위장이나 간장을 해치기만 하니 건강에 좋을 리는 없다. 얼마 전 '섭외담당 직원의 술로 인한 건강악화는 직업병'이라는 판례도 나왔다.

술상무가 아니래도 자신의 행동에 엄격한 사람은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여 술을 마심에도 늘 긴장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사람들을 아주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논어>에 '즐기되 빠지지 말라[樂而不淫]'는 가르침이 있다. 술자리가 많은 연말연시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될지는 모르지만 (술을) 즐기되 빠져죽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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