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69 마령면 동촌리 … (3)화전(꽃밭정이)

▲ 화전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200살 넘은 느티나무. 예전엔 이 나무에서 당산제를 올렸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겼다.
티 없이 맑은 하늘. 마이산이 또렷하게 보이던 12월 19일 아침 화전마을을 찾았다. 남부마이산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 있는 이 마을은 언뜻 보기에도 몇 집 남아 있지 않다.

관광지를 끼고 있어 상점이나 식당이 많을 것도 같지만,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화전가든 말고는 한참을 올라가야 식당이 하나 더 나올 뿐이다.

포근한 햇볕이 비춰 마을에 온기가 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든다. 게다가 마이산이 북쪽을 막아주고 있어 찬 바람이 덜하다. 간혹 얼굴을 비추는 동네 사람들 모습에서도 포근한 인심이 느껴진다.
 
신촌, 중동촌, 꽃밭정이, 화전
보기엔 작아도 화전마을의 역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따르면 1575년경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연화도수, 매화낙지, 금계포란의 명당터를 찾아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이 이뤄졌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이 마을은 밀양 박씨 집성촌이었다.

얼마 전까지 이 마을은 서촌, 금촌과 함께 '서금리(西金里)'라는 하나의 행정리였다. 그러다 두어 달 전 서촌이 행정리로 분리되면서 지금은 금촌과 '화금리(花金里)'리 묶였다. 화전은 본래 '신촌(新村)'으로 불렸단다. 또 동촌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고 해 '중동촌(中東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에 '꽃밭정이'라 부르고 이게 한자어로 바뀌면서 지금의 '화전(花田)'이 되었다.

한 때 이 마을은 밀양 박씨를 중심으로 20여 세대가 모여 살았단다. 마을 뒤 언덕에 잘 정리된 목조형식 건물이 있는데, 바로 밀양 박씨 제실이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떠나고 빈집을 허물어 여섯 집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식당을 하겠다며 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가구 수는 더 적었을 거다.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빈터는 대부분 집터였다. 지금은 집을 허물고 터만 닦아 놓았다. 일부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겠다며 터를 닦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 올해 새로 지은 집 앞에서 박창준씨는 마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봄마다 관광객으로 몸살
남아있는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다. 마을 주변은 골짜기여서 농지가 많지 않아 물 건너 서촌 앞이나 동촌 앞뜰에서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한다. 식당이나 장사는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시작했단다. 동네 사람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열심히 농사지을 뿐이다.

관광객은 4월~5월에 절정을 이룬다. 마이산에서 꽃 구경하려고 찾는데, 수학여행 같은 단체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단다.

문제는 이런 관광으로 마을이 이렇다할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관광객은 대부분 자동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마을에 들를 일이 없다. 마을에서 정직하게 길러낸 농산물을 판매하려 해도 못 믿겠다며 구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근 식당 역시 벌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화전가든은 4~5월 잠깐 손님이 들다가 나머지 기간엔 거의 손님이 없단다. 점심시간이 되면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지만 많지 않다.
 

▲ 화전마을에 뿌리내린 밀양 박씨 제실
남달랐던 교육열
지금이야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예전엔 풍족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녀 교육에 열을 올렸는데, 주민 대부분이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시켰다고 한다. 주민들은 최연소 면장(박희창씨)을 배출했던 게 이런 교육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마을 출신의 한문 선생님(훈장) 고 박태준 선생 또한 대표적인 예다. 형편이 좋지 못했을 일제 강점기,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화전은 물론 반월리까지 돌며 제자를 길러냈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어렸을 적 박태준 선생 밑에서 두어 달 한문을 배웠다는 박창준(62)씨는 '매우 엄한 선생님'이라고 기억했다.

그런데 학문이 깊으면 많은 것이 보였던 모양이다. 박태준 선생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단다.
"언젠가 우리 마을은 꽃밭이 될 것이다."

그때만 해도 화전마을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마을일 뿐이었다. 학교나 논밭에 가려면 마을 앞 도랑에 큰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게다가 큰비라도 내리면 꼼짝없이 고립되던 게 이 마을이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난 뒤 마이산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고, 가장자리엔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주변 경관도 보기 좋게 꾸몄다. 그 덕에 봄만 되면 마을과 주변은 꽃밭이 된다. 주민들은 선생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뿐이었다.
 

▲ 터만 남은 빈터
신명나게 당산제도 올렸다네
이 마을 입구에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 수령이 200년은 훌쩍 넘는다. 예전엔 이 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하고, 신명나는 풍물을 치며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었다. 사람이 떠나고 세상이 변하면서 명맥이 끊겼다.

사라진 게 하나 더 있다. '윷판바우'라고 부르는 바위였다. 바위 위에 윷판이 새겨 있어 그렇게 불렀는데, 도로를 내면서 없어졌단다. 마을 명물 가운데 하나였을 텐데, 참 아깝다.

▲ 마을 약도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