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 선 진 <소설가·주천면 무릉리>

올해가 시작될 때 바다를 사랑하던 그 지인이 떠나면서 내게 선물을 남기고 갔다. 피아노였다. 나는 지금 더듬더듬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이 나이에 무슨 피아노냐고, 늘어진 팔자타령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산 중턱 외딴집에 어울릴 것 같다고 내게 주고간 피아노는 그녀에게서 음률을 익히던 숱한 고사리 손들이 두들기던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바라보노라면 어디선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법 유연하게 그러다가 서툴게 끊기곤 하는 음들이 거실 구석구석에서 잡히고는 했다.

언제쯤 제대로 된 연주 한곡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피아노를 치면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날을 여는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는지 새삼 말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올 한해 나는, 우리는 이웃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얼마나 나누고 살았는지 반성하자고 해보는 소리다.

오늘밤은 소위 '성도'들이 말하는 이브저녁이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할 몸으로 태어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밤이다. 지금은 예언서이며 비밀의 책인 성서의 그 수많은 비유와 예언이 비밀의 옷을 거의 다 벗은 시대다. 그래서 이브는 아기예수의 탄생과 거리가 멀다는 브리태니커의 해석을 더 믿는 나지만 이렇게라도 하루 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 되어 낮아지는 날은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아름다운 선물은 물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한 마음으로 내어놓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내미는 손, 마주 짓는 웃음들이 더 큰 아름다운 선물이다. 이런 아름다운 선물은 선한 마음의 동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선한 마음의 동기가 없는 입에 발린 말과 제스처로 내미는 손, 거짓 웃음은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모독이며 선함의 왜곡이다.

그런데 왜 우리사회는 점점 더 많은 왜곡과 모독을 중심에 앉히려하는지 안타까운 일들만 많다. 이번에만은 뭔가 해내고 보여줄 것 같이 설쳐대더니 결국 슬그머니 입 다물고 마는 직불금부당수령. 부자와 소수민을 위한 정책들속에 유독 반질반질한 이마가 돋보이는 '성도 엠비'의 얼굴은 웃으면서 노인을 향해 거짓 선심을 쓴다. 올해 그가 우리에게 보낸 선물들은 그 포장이 화려하고 겹겹이라 단순한 나로서는 얼른 진의가 파악이 안된다.

당사자의 합의하에 최저임금을 낮출 수 있고 그렇게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4대 강을 살려 일자리를 만들고 녹색경제를 이루겠다는 '성도엠비'의 화려한 약속 뒤에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샛강들의 신음이 들리는데. 그가 드리는 오늘 밤 기도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떠세요. 어렵지 않으세요? 농촌은 불황여파가 제일 늦게 미치는 곳이라고 하는데 아직인가요? 부지런한 농부인 그에게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농촌은 언제나 IMF속에 살잖아요. 순간 가슴위로 살얼음이 얼어왔다. 이것이 오늘밤 농촌에 울려 퍼지는 캐럴송인 듯 싶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30 년 전의 배고픔이 녹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마음부터 두려운 것을 보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회가 달라졌다는 인식이 가져오는 두려움이다. 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아무도 모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저기 정부적 차원에서 마련되기도 하고, 더 많은 종교적 구제의 자리가 있기 전에도 우리의 전통마을에는 고아나 장애인이 굶어죽는 일은 없었다. 마을이 그들도 함께 안고 갔던 더불어 살기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선이란 정말 이런 모습이 아닐까.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성도'와 '비성도'가 아닌 우리 모두 같은 생명이라는 넓은 마음밭이 있었던 소위 이방인의 양심이 살아있던 때. 어쩌면 그 때가, 그 모둠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너무 환한 빛은 그 밑을 가린다. 소경을 따라가면 구덩이로 떨어진다는데 정말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인도자는 소경이 아니길 빌어야지?

믿음은 신비한 체험 같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올바른 정보가 쌓여야만 생기는 당연한 산물이다. 오늘 밤 정말 우리는 선하고 믿을만한 선물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 한해 나는 얼마나 선한 마음의 동기로 이웃에게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함께 웃었던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골방에 들어가 저마다의 반성문을 써야하는 밤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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