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73 상전면 주평리(3)…교동·지사마을

▲ 교동마을에서 바라다 본 다리골. 저 멀리 외송나무로 건너가는 다리가 보인다.
수몰 후 교동마을 조성
진안읍에서 주평리를 찾자면 다리 건너 면사무소 방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유일하게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는 마을이 있다. 바로 교동마을(이장 김재만)이다.

원주평, 문화마을과 마찬가지로 수몰로 인해 새로 조성된 교동마을은 회사마을 동북쪽에 위치한다. 앞 골짜기가 다리골이라 하여 교동으로 이름지었다는 이곳은 주민 모두가 외송마을에서 이주했다. 수몰된 저지대 주민만 이주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아직도 외송마을을 지키고 있다.

졸지에 두 마을이 된 외송과 교동 주민들은 거리상으로 멀어 자주 만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가끔 볼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교동마을을 찾은 날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마을 맞은편으로 다리골이 내리 펼쳐져 있고 골짜기가 끝나는 곳 위로 외송마을로 건너가는 큰 다리가 놓여 있었다.

교동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옛 어른들이 이곳 골짜기를 다리골이라 부른 것도 지금의 다리를 예언한 것 같다는 것이다. 원주평마을의 병마골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 지명의 신비스러움이 다시금 느껴졌다.
 

▲ 교동마을 최고령자 정순열(82) 할머니
오순도순 다정한 주민들
눈 내리는 추운 날씨 덕에 길가에는 주민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회관을 찾아들었다. 몇몇 주민들이 모여 김치전을 부치고 있었다. 다른 방에 계시는 할머니들 간식이라 했다. 주민들 간의 정이 넘쳐나는 분위기였다.

마을을 옮기기 전에는 경조사에 마을 주민 전체가 제일처럼 나서서 일을 도왔는데 주민 수도 많이 줄고 대부분 고령화로 예전과 같은 활기는 사라진지 오래라고 한다.

10가구 30여 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교동마을에도 젊은 귀농인들이 찾아와 마을의 활력이 되었으면 하는 게 주민들의 바람이었다.
 
숲이 울창했던 지사마을
상전면사무소에서 원가막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편으로 지사마을(이장 박승주)을 만나게 된다. 이 마을은 예전에 풍수비보 차원에서 육송을 심어 숲거리를 조성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다리가 폭파되고 그 다리를 다시 복구하는데 숲의 나무를 베어다 섰다고 한다. 울창했던 숲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숲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어른들에 의하면 현재의 마을 앞길은 숲으로 울창했고 원주평에서 원가막으로 가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았다고 한다. 수레도 지날 수 없을 정도의 좁은 길이라 무엇이든 지게로 옮겨야 했다고 한다.

또한 원가막과 후가막 주민 중 길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원주평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 지사마을로 들어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만큼 숲이 우거졌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지사마을 당산나무
당산제 전통 살아있어
지사마을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다는 당산나무가 있다. 다른 마을과 달리 아직까지도 당산제를 거행하고 있다. 현재는 옛날보다 그 준비가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우리 군 향토문화백과사전을 통해 지사마을의 옛 당산제 모습을 살펴본다.

지사마을 당산제는 정월 초사흩날 오전에 마을 뒤편의 당산에서 거행한다. 현재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당산은 세 그루의 노거수인데, 커다란 자연석과 어우러져 여름엔 마을 주민들의 쉼터 역할도 해주는 공간이다.

섣달 보름께 마을 회의에서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은 근신 생활에 들어가는데 집 앞에는 금줄이 걸리고, 황토흙도 뿌려진다. 3일간 목욕재계하고 외출을 삼간다. 재물은 매년 돌아가며 한 집에서 책임지고 준비하되,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고 서로 도와 정성껏 마련한다.

부인네들도 개고기를 먹은 사람이나 부정탄 사람은 제외시킨다. 제물 구입은 이장이 진안장에 나가 해 온다. 팥죽제를 당산제와 병행하여 올리기 때문에 팥죽을 끊여 제물 속에 포함 시킨다. 초이튿날부터 제물을 준비하고 초사흗날 아침에는 당산굿을 치고 나서 당산 앞에서 제관의 주도 하에 제를 지낸다.

제사를 마치면 제물을 장만한 집에 가서 음복을 한 후 원하는 집을 돌며 풍물을 치고 마당을 밟는 지신밟기를 지속한다. 당산제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 있는 지사마을에 근심거리가 생겼다. 작년부터 당산나무가 자꾸 죽어간다는 것이다. 잎이 무성해야 할 작년 여름에 일부이지만 잎이 누렇게 변하며 떨어지더란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도 무너졌다는 지사마을 주민들.
 

▲ 지사마을 회관에서. 왼쪽부터 김금이(69), 황선순(73), 김을래(70), 임칠순(77), 강복이(70), 이상리(76) 할머니
척박한 마을로 시집 와 고생
타지에서 시집 온 마을 할머니들에 의하면 지사마을은 농토도 적은데다가 있는 밭도 돌 반 흙 반이어서 농사짓기가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만큼 소출도 적어 마을 전체가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하니 할머니들의 주름살이 더 깊어 보였다. 얼마나 농사짓기 힘든 마을이었으면 이곳을 예전에는 '녹두밭웃물'이라고 했겠는가. 녹두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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