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구자인 <진안군청 마을만들기 담당>

흔히들 일본 농촌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 유학생활 6년 반 동안 내린 결론은 '늙은 고목이 링게르(링거) 주사를 맞으며 유지'되고 있는 것이 일본 농촌에 불과하였다.

행정, 연장자, 남자 중심의 의사결정 방식이 강고하고 외지에서 오는 귀농인을 배제하는 풍토가 뿌리 깊기 때문이었다. 또 안정된 마을 시스템이 오히려 개개인의 창의성과 활력을 강하게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 농촌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고 제3의 길을 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했기 때문에 시행착오 사례가 훨씬 많고 거기서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큰 과제도 숨어 있는 셈이다. 핵심은 농업의 공업화, 농촌의 도시화, 생산자 농민의 소비자화 과정을 거쳐 온 역사 속에 있었다.

무엇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서구화를 발전모델로 삼은 점, 다시 말해 농업과 농촌, 농민 스스로에 내재된 가치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 발전이라 생각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또 국가 주도로 농촌개발을 추진해온 방식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스스로의 자주적 역량을 키우지 못한 채 지나치게 중앙이나 행정에 의존하였던 결과가 현재의 일본 농촌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농정이나 다양한 농촌 활동도 이 점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어 아쉽다.

현재 진안에서 열심히 추진되는 마을만들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접한다. 주민들을 위해 쉽게는 '21세기형 새마을운동'이라 답하게 된다.

하지만 70년대 새마을운동과는 분명히 다르고 그 점은 바로 일본 농촌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과 연결되어 있다. 21세기 새마을운동(마을만들기)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관련하여 반성점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 해서 결코 과거를 전면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구호가 당시로서 설득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부심을 버려서는 안되고 농촌다움의 본질은 유지했어야 한다. 돌아보기 싫은 배고픔도 색바랜 마을 경관도 결국은 현재의 우리 모습을 규정한다. 과거와 단절된 새로움은 천박할 뿐이고 스스로를 슬프게 할 뿐이다.

또 '마을'이란 공간이 오랜 역사 속에 가꾸고 발전시켜온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란 점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 마을은 개발해서 단시간에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마을마다 가진 고유한 역사와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함부로 개발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살고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디더라도 토론하고 합의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운동'은 구호나 캠페인과 달라야 한다. 교육, 특히 집합식 교육을 통해 사람 의식을 개조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러한 발상법은 민주주의에 오히려 역행하고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위(중앙, 행정)에서 아래(지방, 주민)로 내려오는 하향식의 캠페인으로 사람과 지역이 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운동이란 철학이 있어야 하고 목표와 전략이 명확해야 성공한다.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외부 움직임에 저항하고 주민자치의 문화적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반성 위에 마을만들기 활동이 시작되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이 내세웠던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은 용어의 뉘앙스는 달라도 마을만들기 철학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마을만들기를 21세기형 새마을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방법론에서 몇 가지 차이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행정과 주민, 전문가 사이의 삼자 협력관계를 중시한다는 점,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 주민들의 자발적 참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지금 대부분의 농촌은 빈사상태이고 최악의 궁지로 몰고 있는 외부 압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회생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새마을운동과 마을만들기는 "풀뿌리 마을이 살아야 농촌이 산다"는 가치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주민자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제는 농촌 마을 살리기를 위해 서로 만나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야 일본 농촌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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