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박선진 <소설가·주천면 무릉리>

부모와 조국, 타고난 용모는 바꿀 수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천성으로 알고 있었던 용모가 돈과 발전된 성형으로 이젠 거의 재창조의 수준까지 도달한 이 나라의 기술력이다.
티비속 연예인들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보통사람들도 이젠 성형이 흉이 아닌 적극적 삶의 방식이 되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이제 신데렐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세계화와 높아진 소득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도 17일 뉴스는 충격이었다.

태어나는 자식에게 원정출산으로 미국국적을 얻어주는 게 부모의 선물이라 하는 그들을 보면서. 만삭의 몸으로 겪는 고초는 어미로선 당연히 감당할만한 것이고 그 비용만도 평균 1억이 든다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 거리감은 단지 가난의 좌절일 뿐이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배워온 많은 지식과 규범들은 지배자의 통치수단인 세뇌였다. 조국에 대한 것이 그렇고 효에 대한 것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가난한 집에서 부모의 밥을 축내는 어린자식을 내다버리는 효성스런 자식에게 하늘이 내려준 산삼이야기나 한 겨울 얼음구덩이를 깨고 잉어를 잡아 올리던 효자는 자기 자식에게서 대물림의 효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까? 자식사랑은 내리사랑이고 눈 먼 사랑이다.

그걸 잘 아는 선조들이었기에 자신들이 늙고 병들었을 때의 방비책으로 효에 대한 개념을 만들고 규범을 세워 자식들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 손주를 돌보면서 다시 하게 된다.

젊은 날에는 효는 못 할망정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감히 드러내 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손주를 키우다보니 자식보다 더 사랑스럽다. 그래서 다시 해보는 생각이다.

조국- 부모세대들이 생각하는 조국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러나 내려갈수록 조국에 대한 의리(?)는 희박하다. 그럴 수밖에 조국은 여러 가지 논리로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소수의 권력이지 하늘이 내린 위민이 아님을 알아버렸으니까.

기술이 생명의 복제까지 이르다보니 종교도 다신에서 유일신으로 다음에는 무신으로 진화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도 불변이란 없고 진리도 상대적이 된 현대에서 자식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 마음에 돌 던질 자 없을 것이다. 나는 비록 이런 구차한 나라에 살아도 너만은 신세계에서 살 것이다. 살게 해주마.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 쯤 동요 받지 않을 자신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런 자들 일수록 이 나라의 혜택은 더 많이 누리는데 그 혜택을 밑거름 삼아 자식을 낳는 순간 남의 나라에 바치는 배신을 저지르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들에게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지 못해 안달하는 이 나라는 국가가 아니라 패밀리 조직이다.

그렇다면 배반은 아무런 수혜도 받지 못하는 우리 서민의 몫이 아닐것인가 말이다. 그들은 소수이다. 그런데 소수는 언제나 다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소수는 소수가 되는 순간 자신이 다수속에서 나왔음을 잊어버리거나 더 망상적이 되어 선택된 소수라 믿는다. 또한 대부분의 다수인들은 자기들도 나름대로의 소수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소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된 소수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정부도 태어난 것이다.

사람을 하나도 아니고 다섯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하는 진압이 무슨 진압인가. 그건 살상이고 공격이다. 개인의 흥을 위해 로마를 불태우던 네로 흉내를 산에서 내보겠다는 것인가. 작은 우리나라 전역이 축제흉내내기에 골병이 들어가는 현장이다.

잊을 만하면 총성이 들리고 애맨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가자지구의 뉴스를 보면서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던 때였기에 그 보도는 충격이 크다.

정말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재수없는 국민이란 말인가. 우리 손주는 한국국적밖에 얻어주지 못해 미래가 없다는 말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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