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2009 신춘방담(新春放談) ③
윤 영 신(서울타임스회장)

◆영혼(靈魂)의 흔적(痕迹)을 위하여
"주여,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목숨 다하는 그날까지/당신과 함께 영원을 향하여 걷고 싶습니다./형제들을 위한 봉사 속에/형제들을 위한 가난 속에/글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면서/사랑으로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싶습니다."

추기경의 일생 중 가장 엄혹(嚴酷)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시절 인간적 외로움 속에서 종교인이고 신앙인으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논·픽션(nonfiction)의 한계를 픽션(fiction)화(化) 하여 그것을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 합일(合一)을 간절히 원하는 믿음으로 이어간 이 자작시 '나의기도'가 당시 추기경의 심정이였다고 추기경은 고백한 적이 있었다.

1922-2009. 그렇게 지나간 그 한 세기(世紀), 우리네 질곡(桎梏)의 그 역사(歷史)속에서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의 반열(班列)을 뛰어넘어 민중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은 추기경만이 갖고 있는 사랑과 봉사와 나눔의 역할을 몸과 마음으로 거짓 없이 다 하는, 그 역할이 청빈(淸貧)하지 않은 사회의 도덕적 중심에 있었으며, 더욱이 이 시대 우리의 사회에 격동의 세월로 몰아쳤던 그 풍랑(風浪) 속에서 권력에 억압받던 인권(人權)과 독재(獨裁)에 신음(呻吟)하던 민주주의의 소생(蘇生)을 위하여 언덕의 역을 다 한 이 시대 이 땅의 정신적 지주(支柱)였고 양심의 대변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카인 이후 그렇게 죽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카인이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 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아께서 카인에게 이른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이 이른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성서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다.

추기경이 성직자로서 평탄한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기경은 항상 도망 갈 궁리를 하면서 두리번 두리번 이 세상을 살아왔노라 고백한다. 1970년대, 1980년대의 군부독재를 비판하며 민주화의 중심에 서서 우리 사회를 어우르는 큰 어른의 역을 맡기도 하였으나 그 시절이 끝나는 즈음에는 한때 추기경의 지원을 받았던 바로 그 세력의 권력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즈음하여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위하여 독재자와 담판 짓던 추기경의 피곤해 있었던 그 모습에서 우리는 나라의 앞날을 읽었다. 87년 6.10항쟁 때 온 몸으로 경찰을 막아내던 명동성당에서의 추기경을 보면서는 든든한 배경을 찾았고,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는 서부활극 같은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추기경의 고뇌와 연민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배웠었다.

한번이라도 만났거나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던 저 백성들의 긴 추모행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지금 민족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추기경에게도 내 신앙과 생활에 관한 고민은 있었겠고,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했었던 행복한 세상적인 추억도 있었겠고, 어릴적 국화빵 팔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붉게 물든 저녁하늘을 바라보던 그리움도 있었을 것이다.

추기경은 생전의 소박하고 솔직한 그 삶의 현장에서 죽음도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고 삶과 같이 아름다움인 것을 배우게 하여 주었다. 추기경의 선종(善終)을 애도(哀悼)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니라.(요한20장30절)」선종(善終)이란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의 줄임 말이며, 라틴어의 거룩한 죽음(mors sancta)을 번역한 천주교 용어. 불교의 입적(入寂)이나 개신교의 소천(召天)에 해당하며 서거(逝去)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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