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78 진안읍 가막리…상·하가막마을

▲ 수령을 알 수 없는 느티나무가 상가막마을 한 가운데 늠름히 서 있다.
장막이 겹겹이 앞을 막은 것 같이 첩첩산중이라 이름 붙여진 가막리. 굽이굽이 찾아가는 길은 지명만큼이나 오지인데 막상 보이는 마을 모습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을 공동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체험관, 공원 등 변화의 바람이 물씬 느껴졌다.

가막리는 그동안 가막마을이라는 단일 행정리였는데 재작년 5월에 두 마을로 분리되었다. 원래부터 상가막과 하가막이라는 자연 마을이 각각의 공동체로 움직였지만 그동안 가막마을이라는 단일 행정리로 묶여 있다가 이번에 두 행정리로 정식 분리되고 마을 이장도 각각 선출했다.

마을 분리 시기에 두 마을 간에 약간의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어려워만 가는 농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상생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가막리 주민들이 찾은 상생의 길은 협력이었다. 현재 가막리는 녹색농촌체험마을사업 등 여러 마을만들기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율무, 산양삼, 오미자 등 작목반 구성을 통해 농가 소득을 올리고자 하는 이때에 두 지역 간의 갈등이란 있을 수 없었다. 무조건 협력하고 마을 발전이 곧 주민 개개인의 발전이라는 인식을 마을 주민 모두가 가졌던 것이다.
 
교회가 주민 화합 견인차
가막리 주민 대부분은 같은 교회에 다닌다. 자기가 옳다고 자신의 목소리만 주장하는 주민이 없고 마을 일을 이끌고 있는 젊은이들은 모든 사안들을 마을 어른들께 꼭 의견을 묻는 방식으로 마을 일을 진행하다 보니 별 잡음 없이 마을 일이 잘 이루어진다고 했다.

산골 오지 가막리에 작년 들어서 변화의 바람이 성큼 다가왔다. 그 변화가 거의 분기별로 보인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는 '전국YMCA가족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후원한 행사였는데 5백여 명이나 참석했다.

그 많은 인원의 식사를 마을 주민들이 직접 제공했다고 하니 웬만큼 뜻이 모이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을의 결집한 힘이 여실히 드러났던 행사였다.
 

▲ 멀리서 내려다 본 가막마을 모습
마을 길 넓히는 데 10년 걸려
가막리에서 진안 장에 가려면 30리 길을 걸어야 했다. 아침밥을 먹고는 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지게에 지고 출발하면 점심때가 되어 도착했다. 물건도 팔고 이런저런 일을 보다 집에 돌아오면 캄캄한 밤이었다고 하니 그 고단함이 어땠는지 짐작이 갔다.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어려움에 한탄만 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 모두가 괭이를 들고 가막리에서 진안읍 방향 큰길로 연결되는 오천리까지의 길을 넓혔다. 중장비도 없이 인력만으로 산길을 넓히는 작업이 오죽 힘들었을까.

장장 10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 노고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마련된 비포장길로 버스가 하루 2차례 들어와 주민들의 삶의 무게를 달래주었다고 한다.
 

▲ 리모델링 되어 깔끔해진 옛 가막분교.
130명이나 되던 아이들은 어디로
상가막 하가막 중간쯤에 옛 초등학교 건물이 있다. 폐교된 지 14년이나 되었지만 건물 외관은 깔끔했다. 외지인이 매입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리모델링을 해서란다.

학교를 건립할 당시 마을 사람들은 터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 산길로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어려워 상전에서 죽도를 거쳐 가막리를 지나는 하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막리에는 지금도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하는 농가가 대여섯 집이나 된다. 산골이라 밭 대부분이 산비탈에 조성돼 있고 그 경사가 심해 트랙터 사용이 어렵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에도 소 쟁기를 잡는다는 한 할아버지는 "소 쟁기가 허리 부러지는 일이라고 하지. 하지만, 웬만한 경사지도 너끈히 갈아엎는 소 쟁기를 놓을 수야 있나. 힘닿는 날까지 잡기는 하겠지만 어디 세월이 기다려주나."라고 말했다.

▲ 하가막에 건립된 체험관과 정자 모습.
▲ 상가막 이상근(81) 할아버지가 소막에서 소를 돌보고 있다.
▲ 하가막 정대준씨가 마을을 안내해 준 뒤 공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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