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85 진안읍 가림리(3) … 탄곡마을
현재 과거 엇갈리는 마을

▲ 탄곡마을의 장채선 이장

부스러기. 청년의 손등에 불쑥 솟아난 정맥처럼 산은 능선마다 푸른데, 마을은 조금씩 부서지는 모양새다. 낡은 돌담이 허물어지고 나무 대문이 바람에 삐거덕 소리를 낸다. 주인 없는 빈 집 창호문은 구멍이 숭숭 뚫렸다.

마당엔 잡초만 무성할 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노인마저 비바람에 삭은 비석처럼 보일 지경이다. 부스러지는 것들 위로 가난의 기억을 지우듯 새로 올리기 시작하는 집. 공사 중이다. '오래된 미래'가 머무는 마을. 현재와 과거가 탄곡(炭谷) 마을에서 엇갈리는 중이다.

마을진입로 좁아 군 상대로 하소연 … 숯을 만들어 파는 마을이랬다. 시꺼먼 마을이 아니라 연녹색 4월의 나뭇잎이 싱그러운 산촌 마을이다. 마을숲 나무엔 새가 구멍을 뚫어 들랑날랑 한다. 참나무를 태우던 숯쟁이들의 후손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마을은 사라지지 않았다. 껌껌한 밤에 몰래 밭을 기어가 넝쿨을 끌어당기면 단단한 수박 한 덩이가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그걸 바위에 쳐 깨먹고, 대보름날엔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마을 이장이 됐다.

"저 질(길)이 문제요! 좁아터져서 말여."
장채선 이장(55)은 모정에 앉아 마을 입구를 가리킨다. 저 길 때문에 전화통에 불이 났었단다. 몇 년째 군을 상대로 하소연을 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에 걸린 모양이다. 언제나 '예산'이 문제다. 국민 1인당 1년 동안 세금을 150만원씩 내는데, 그 놈의 돈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문득 건네주는 손을 보니, 홍삼진액이 들려 있다.

장 이장의 어머니는 생고사리를 말린다. 지팡이로 뒤적뒤적. "뱉이 심이 없어."
햇발이 약하다는 말이다. 올해 여든 일곱. 백발이 성성하다. 며느리가 도시로 가서 편히 살자고 해도 고향을 떠날 수 없다.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하면 그게 제일이다. 장 이장의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지레 지쳤는지 토방으로 올라가며 어디서 나왔냐고 묻는다. 시골 마을에서 낯선 사람들은 무조건 호기심의 대상이다.
 

▲ 마이산 뒷동네 탄곡마을.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힘센 일꾼들이 사는 동네, 숯동네 … 33년 전 전남 여수 바닷가에서 산골로 시집온 새색시 서미복(53) 씨. 마을 주민 장세진 씨의 아내다. 사무직원으로 일하다 남편 따라 산촌에 들어왔다. 추수를 가을에 하니, 봄부터 가을까지는 수입이 없어 빈곤했다. 소를 먹이고 축사 청소까지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농사일이 너무 고된 탓에 울기도 많이 울었을 게다. 서 씨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이 세상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생이 아닌, 저 생에, 저 생 다음 그 너머 생에. 꿈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무지개다.

마을 주민들이 일 잘하기로 소문난 동네가 이 곳 탄곡 마을이다. 마을 주민 장세진 씨(53)의 말에 따르면 벼농사와 인삼을 주로 재배하는 동네지만 타고난 일꾼들이 많단다. 곁에 있던 장 이장이 끼어든다. "우린 솜씨가 좋아요. 마늘밭에 가 보면 알 거요. 어찌나 촘촘한지."

동네 일꾼들은 여름이면 백운동 계곡으로 노인들을 이끈다. 장 이장과 장세진 씨가 젊은 축에 속하니, 어른들과 함께 마을 단합대회를 여는 주최 측이다. 나이든 노인들 모시는 일도 젊은 일꾼의 몫. 그 일꾼들 나이가 오십이 훨씬 넘었다. 노인들은 마을숲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마을에 액운이 비켜가길 빌고 또 빈다. 주민이 줄어드는 판에 뭐라도 붙잡거나 기대고 싶은 모양이다. 국가가 사회안전망을 깔아주지 않는 한 가족에게 의존적이기 마련이다.
 

▲ 생고사리를 말리는 할머니. 그이는 탄곡마을을 닮았다.
마을 숲 동네를 지키고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다. 틀렸다. 암탉은 알을 낳는다. 여자가 순해 빠지면 그이의 일생은 어땠을까. '순한 사람' 정순녀 할머니(75). 마을이 '해성'하단다. 마을 주민들이 죽고 떠나고, 일부는 남았지만 휑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외지로 떠나간다. 농사는 망쳤지만 다들 자식 농사라도 제대로 짓고 싶은 참일까. 도시로 나간 사람은 가게를 열거나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신분은 세습된다는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의 한 구절이 진실이라는 것을, 떠난 사람들은 몰랐을 터이다.

뒤를 돌아보니, 굽이굽이다. 좁은 시골길이지만 시멘트를 발랐다. 하수도 공사 중. 차가 튕겨오를 정도로 울퉁불퉁하다. 마을숲이 냉큼 흰 가래떡 먹듯 길을 막아버려 동네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백운을 뒤로 하고 탄곡을 떠난다. 소나기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숯처럼 부스러질 것만 같은 마을이지만 검댕을 오래 묻힐 사람들이었다.

▲ 빈집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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